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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19주년 특별기획: 중국 원주촌, 그 후 10년 ②
"고향 다녀온 뒤 얼마나 자랑했는데…"
2014년 10월 27일 (월) 김민호 기자 mhkim@wonjutoday.co.kr

   
 

원주투데이는 지난 2005년 창간 10주년 기획취재 '중국 원주촌을 찾아서'를 통해 일제강점기 일제의 선동과 회유, 협박에 의해 만주로 강제 이주된 원주사람들의 이야기를 보도한 바 있습니다.

시대의 아픔을 안고 낯선 타국 땅에 뼈를 묻어야 했던 그들의 이야기에 많은 분들이 관심을 가져주셨습니다. 보도 이후 원주시가 현지 답사를 통해 '중국 원주촌 연구'를 발간하는 등 원주촌 기록 정리에 나섰고 2007년에는 이주 1세대 5명을 원주로 초청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민간 차원의 교류 및 원주촌 후손들에 대한 지원 등이 활발하게 논의됐지만 2007년 이후에는 옛 이야기가 되어 버렸습니다.

올해는 중국에 살고 있는 원주사람들의 이야기가 고향에 소개된 지 10년째 되는 해입니다. 원주투데이는 이미 많은 이들의 머릿속에서 희미해진 그들이 궁금했습니다. 당시 우리가 만난 그들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그들이 집단부락을 이루고 살았던 원주촌은 어떻게 달라졌을지….

그래서 다시 원주촌을 찾았습니다. 중국 길림성 조선족 자치구 연길시와 안도현 일대, 도문 등지에서 아직 생존해 있는 이민 1세대와 그 후손들을 만나 그들의 지난 10년의 삶과 고향 원주에 대한 생각을 들었습니다.

1. 프롤로그-만주로 간 사람들
2. 원주촌, 그리고 청구자
3. 남은 사람과 떠난 사람들
4. 민간 교류 20년 '정암촌'
5. 민족혼을 지키는 사람들
6. 좌담회-원주와 중국 원주촌

원주촌에서 청구자로

해방 이후까지 실존했던 원주촌은 안도현 중부에 위치해 있다. 중국에서의 지명은 길림성 안도현 신합향 청구자로, 연길에서 자동차로 2시간 30분 거리다. 마을 북쪽으로는 목단령과 대왕산이 있고 서쪽은 미혼진산이 둘러싸고 있으며 남쪽은 중봉령이 높이 솟아있다.

특히 중봉령은 일제에 맞선 항일무장세력의 근거지였다. 이런 지역적 특성 때문에 일제는 이 지역에 집단부락을 만들고 무장세력의 공격으로부터 방어와 토벌을 목적으로 한 군사기지로서의 기능에 신경을 썼다.

항일독립운동 원주기념사업회 윤병진 연구위원은 "원주촌은 명월구에서 안도현 소재지로 연결되는 명안공로가 지나는 평지의 길목에 위치해 인근 다른 마을과 비교해 일제가 전략적 방어기능에 특별히 신경을 썼다"면서 "평시에도 일본군 수비대나 만군 등 항일무장 세력을 공격하는 주둔지로 활용됐다"고 말했다.

중국에서 발행된 지도에도 원주촌이라고 표기 됐을 만큼 과거 원주촌이 이 마을의 공식 지명이었지만 해방 이후 거주하던 원주사람들이 모두 떠난 뒤에는 산동인들이 빈 자리를 채웠고 지금은 청구자가 공식 지명이 됐다. 이 곳은 원주사람들이 정착 하기 전에는 원시림이 들어선 습지로 인적이 드문 곳이었다. 역사를 더 거슬러 올라가면 복옥저와 고구려, 발해의 터전이기도 하다.

   
 
10년만에 찾은 원주촌 달라진 청구자

10년만에 다시 찾은 원주촌은 몰라보게 달라져 있었다. 마을 안길까지 모두 포장이 되어 있는 것은 물론, 주택과 담장이 모두 현대식으로 단장됐다. 10년 전 붉은 지붕 일색이던 전형적인 중국 가옥들은 흰색 벽과 검은색 기와로 한층 세련된 형태로 변모했다.

청구자라는 마을 표지석이 놓여있던 자리에는 꽤 규모가 큰 노인 요양시설이 들어섰다. 마을 곳곳에 신축 주택이 건설중이고 지붕 개량을 하거나 증축 공사를 하고 있는 집도 여럿이다.

이 마을 촌장 리진롱(26) 씨는 2008년 북경 올림픽을 전후로 마을 현대화 사업이 본격 추진됐다고 했다. 중국 경제가 발전하면서 이 곳뿐 아니라 중국 내 농촌도 급격히 현대화되고 있다는 설명이다.

지난해부터 마을 촌장을 맡고 있다는 이 젊은 촌장은 조부가 1960년 산동에서 이 곳으로 이사와 자리를 잡았고 자신은 이 마을에서 태어나 지금까지 농사를 지으며 살고있다고 소개했다. 과거 이 마을이 원주촌이라 불렸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어릴 때 할아버지로부터 이 곳이 원주촌이라는 조선족 집단부락이 있었던 곳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밝힌 리진롱 씨는 "현재는 176호 500여명의 주민이 거주하고 있는데 모두 한족으로, 농사를 짓거나 안도현 소재지에 직장이 있는 사람이 대부분"이라고 밝혔다.

중국 원주촌 연구가 발간된 2007년 지역 내에서 논의됐던 원주촌 박물관 건립이나 표지석 설치에 대해 이 곳 주민들의 생각이 궁금했다. "이 마을이 일제강점기 우리 역사에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밝힌 뒤 조심스럽게 "원주사람들이 이 곳에 원주촌이 있었다는 사실이라도 알 수 있도록 원주촌 역사를 기록한 작은 표지석을 마을 내에 세우는 것이 가능하겠느냐"고 묻자 "자신은 반대하지 않지만, 현 정부와 논의한 뒤 마을 주민들의 의견도 들어야 한다"는 조심스런 답변이 되돌아 왔다.

   
 
이주 1세대 중 확인된 생존자 2명

안도현 인근에 현재 생존이 확인된 이주 1세대는 모두 2명이다. 2005년 취재 당시 만난 김진복 씨와 2007년 원주시와 항일독립운동 원주기념사업회 초청으로 원주를 다녀간 박정옥 씨가 유일하다.

그 외 이도구, 김광복, 김양수, 홍병옥, 김순묵, 박동락 씨 등 원주촌의 역사를 생생히 증언해 준 이들은 이미 고인이 됐거나 타 지역으로 이주하면서 연락이 끊겼다.

원주에 중국 원주촌의 실상을 처음 알린 이도구(지정면 보통리 출신) 씨는 국적을 회복해 서울 영등포에 거주하다 2008년 노환으로 별세했다. 2007년 원주시 초청으로 고향을 방문했던 김광복(신림면 신림리 출신) 씨 역시 암 투병 중 2008년 눈을 감았다.

원주 출신은 아니지만 이도구 씨와 함께 원주촌에 세운 소학교에서 교사로 일하면서 그곳에서 태어난 2세들에게 조선말과 역사를 가르치고 민족의식을 일깨운 김양수 씨는 다른 지역으로 이사를 갔다는 소식만 전해질 뿐 연락이 닿질 않았다.

유일하게 남은 김진복 씨와 박정옥 씨는 지병과 고령으로 현재 안도현 외곽에 위치한 요양시설에 입주해 있다. 가족들은 "두 분 모두 남녘 하늘을 바라보며 매일 고향땅을 그리워하고 있다"고 했다.

   
◇김진복 할머니
"꿈속에서라도 가고싶은 내 고향 원주"

10년만에 다시 만난 김진복(81·지정면 신평리 출신) 씨는 눈물부터 떨궜다. 안도현 정부 농촌부녀회 간부로 30여년 이상 전국인민위원회 위원을 지낸 여장부 김 씨도 세월 앞엔 무기력했다.

 9년 전 중풍으로 쓰러진 뒤 지금은 부축없이는 앉지도 설 수도 없다. 이제는 기억 속에서도 아련해진 고향의 모습과 6년 전 사별한 남편 김 씨와의 추억만이 팔순 노인의 마음을 지탱하고 있다.

김 씨는 남편 김광복(2008년 작고·신림면 신림리 출신) 씨와 함께 2007년 고향방문단 초청대상에 올랐지만 2006년 갑작스럽게 찾아 온 중풍으로 자리에 누워 결국 고향방문을 접어야 했다.

2005년 취재 당시만 해도 귀가 어두운 남편을 대신해 많은 증언을 들려준 그녀였다. 평생의 꿈인 고향방문을 포기한 뒤 전화통화에서는 "그래도 할아버지는 가시니 내 대신 많은 것을 보시고, 또 다녀와서 소식을 전해 주시지 않겠느냐"며 애써 마음을 달랬었다.

"원주를 다녀 온 영감이 두고 두고 고향 자랑을 얼마나 했는지 모른다"고 전한 김 씨는 "죽지 말고 신림 고향에 가서 살자고 하더니 몸쓸병에 걸려서…"라며 연신 눈물을 떨궜다.

김 씨는 "그래도 죽은 남편은 고향에 다녀왔으니 여한은 없을 것"이라며 "나도 꿈속에서라도 가고 싶은 고향이지만 이제는 내 다리로 나가지도 들어오지도 못한다"며 끝내 말을 잊지 못했다.

 

"원주시민 따뜻한 환대 잊을 수 없어"
 

   
◇박정옥 할머니
원주촌 1세대 중 박정옥(86·호저면 만종리 출신) 씨는 그래도 사정이 좋은 편이다. 2007년 고향 방문길에 생면부지의 사촌을 찾아 지금도 서로 소식을 교환하며 왕래하고 있다. 요양시설에 몸을 의탁하고 있지만 시설 내에서 유일하게 부부가 입주해 함께 지낸다. 지금도 빨래며 어지간한 살림은 남의 손을 빌리지 않아도 될 만큼 기력도 유지하고 있다.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슬하의 1남4녀 중 딸 셋을 한국으로 출가시켰다. 한국에 나가 일하던 중 자연스럽게 인연을 만났다는 박 씨는 "한국에서 살고있는 딸들이 지금은 날 대신해 원주 이모집을 수시로 왕래하고 명절이면 인사를 드리러 간다"고 했다.

2007년 고향 방문 당시 "원주시민들의 따뜻한 환대와 많은 분들의 도움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고 전한 박 씨는 "앞으로 내가 얼마나 더 살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늘 감사한 마음을 잊지 않겠다"고 했다.

"원주촌 토성 중국도 주목"
손춘일 연변대 교수

 
   
◇손춘일 연변대 교수

"원주촌 주민들이 1937년 구청구자에 건설한 토성은 보존가치가 매우 큽니다. 안도현 일대에 원주촌을 비롯한 조선족 집단 이민자들의 부락이 있었고 현재도 유지되는 곳이 있지만 당시 건설한 토성이 지금까지 원형 그대로 남아있는 곳은 원주촌이 유일하기 때문입니다."

연변대 손춘일(59) 교수는 원주사람들이 일군 원주촌은 연변자치주나 중국 정부에서도 주목하고 있다고 말했다. 해방 이후까지 원주촌이 실존했던 지금의 청구자도 외형은 바뀌었지만 주택의 구조나 넓이, 중앙 공로를 중심으로 좌우에 배치된 격자형 형태의 배치는 옛 모습 그대로라고 설명했다.

원주시가 펴낸 중국 원주촌 연구 발간사업에 참여했고 지난 2007년 중국 원주촌 1세대 5명을 인솔해 직접 원주를 방문하기도 했던 손 교수는 역사학자로서 원주촌에 관심은 물론, 애정도 많은 인물이다.

올해 안에 북경TV와 함께 원주촌 옛 토성 탐사에 나설 계획도 밝혔다. 연변에서 역사와 문화자원을 통한 관광산업의 중요성이 날로 강조되고 있는 가운데 토성의 원형을 확인하고 보존방안을 찾기 위함이라는 설명이다.

손 교수는 "주 정부나 현 정부에서 원주촌이나 구청구자에 있는 토성의 가치가 크다고 판단하면 문화보존구역으로 지정해 보존관리도 가능해진다"면서 "일제에 의해 굴절된 역사를 이해하고 교훈으로 삼기 위한 귀중한 유산인 만큼 소실되기 전에 더 많은 관심과 노력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이 기획취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원을 받아 이뤄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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