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형운 옹이 50년 동안 남을 돕기 위해 저금해 온 나무저금통인 '사랑의 샘'을 들고 있다.

함경도에서 사업을 하던 강형운(88) 옹의 부친은 유능한 사업가이자 젊은 인텔리였다. 부친은 크리스마스 날이 되면 가족과 모여 나무로 된 저금통을 개봉했다.

저금통에는 1년 동안 저금한 동전이 가득 들어 있었다. 부친은 강 옹에게 이 돈을 어디에 사용하면 좋겠냐고 물었다. 강 옹은 학비가 없어 학업을 할 수 없는 친구들을 위해 사용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부친은 강 옹이 8살 되던 해 돌아가셨다.

유년시절부터 명석하기로 소문난 강 옹은 서울에 있는 대학(현 서울대학교)에서 의술(외과)을 전공했다. 대학 1학년 때 8·15해방을 맞았고, 한국전쟁도 겪었다. 강 옹은 "당시 인턴제도가 없었지만 미군이 상륙하고 난 뒤 인턴제도가 생겼고, 대학은 서울대학교로 명칭을 바꿨다"고 회상했다.

1·4 후퇴 때 입대해, 대구에서 2주간 훈련을 받고 원주에 있는 부대에 군의관으로 배치됐다. 강 옹은 "원주는 최전방이었고 부상병들이 속출했다"며 "군의관으로 매일 생과 사를 넘나드는 병사들을 위해 의술을 펼쳤다"고 말했다.

제대하고 싶었지만 군에서는 강 옹의 실력을 높게 평가해 8년 동안 복무해야 했다. 당시 정부는 미국과의 친선을 위해 전국에서 사절단 5명을 뽑았고, 강 옹도 포함됐다. 한미사절단 책임은 막중했다. 남과 북이 대치된 상태에서 미국은 남한의 절대적 지지자였고, 관계유지와 향후 재건을 위해 꼭 필요한 존재였다. 사절단의 노력여하에 따라 이 모든 것이 결정될 판이었다.

전쟁이 끝난 뒤 원주에는 의사가 20명 남짓이었다. 강 옹은 고(故) 문창모 박사와 함께 원주의 재건을 위해 노력했다. 서울대학교에서 강의를 하고 싶었지만 원주에 정착하기로 했다. 중앙동에 동산외과의원을 설립하고 진료를 했다. 전쟁의 상처가 아물지 않았던 때라 원주는 폐허와 다름없었다.

원주역에는 노숙자가, 원주천 원주교 밑에는 고아와 거지들이 있었다. 강 옹은 그들을 도울 방법을 모색했다. 유년시절 가족과 함께 채우던 저금통이 생각났다. 1964년 강 옹은 목수를 찾아가 나무로 된 저금통을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다. 저금통 이름은 '사랑의 샘'이라고 붙였다.

집 안에 저금통을 걸어 놓고 가족, 친구, 손님 등이 올 때면 잔돈을 넣어달라고 부탁했다. 1년이 지난 크리스마스 날이 되면 부친이 그랬던 것처럼 가족과 함께 모여 저금통을 개봉했다. 저금통이 워낙 커서 개봉할 때마다 100만원이 넘는 돈이 쌓였다.

덕분에 가족들은 저금하는 생활이 습관이 됐다. 강 옹은 이 밖에도 치악장학회에 3억원을 기부했다. 돈이 없어 학업을 포기하는 학생들을 보면 가슴이 아팠다. 1975년 뇌졸중으로 한쪽 얼굴이 마비되면서 병원 일을 그만뒀다. 하지만 '사랑의 샘'은 여전히 거실 한복판을 차지하고 있다. 4명의 자녀 모두 의사가 됐고, 손자들까지 저금하는 생활을 실천하고 있다. 강 옹은 은퇴한 이후에도 여전히 활발한 나눔 활동을 펼치고 있다.

아내 김광옥 여사가 암 투병으로 병원에 입원해 있어 병간호를 하고 남는 시간 틈틈이 봉사를 한다. 강 옹은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나도 그랬고 내 아이들도 그러할 것으로 믿는다"며 "세상과 작별하는 시간이 얼마 안 남았지만 남아 있는 시간동안 남을 위한 삶을 실천하고 싶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