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산동 언덕배기 일산초등학교 운동장이 한눈에 내려 보이는 곳에 자리잡은 '원평의 집'. 원주 미술계의 산증인 원평 이재걸(83) 화백의 집이다. 집안 구석 구석마다 그림과 수석, 야생화를 벗삼아 평생을 살아 온 성품이 그대로 묻어난다. '원평의 집 올해 여름 치악산 하에…'라고 시작되는 문패는 조각가인 작은 아들 동훈 씨가 새긴 것이다.

이 화백은 현 원주예총 전신인 문총의 설립구성원이자 원주미술협회를 창립한 원주 미술계의 산증인이다. 원주 최초의 미술학원 '민 아뜨리에'를 운영했으며 상지여고 전신인 성화여상과 대성학교 등에서 미술교사로 재직하면서 수 많은 후학을 키워냈다.

또한 치악미술동우회를 창립한 것을 비롯해 원주미술협회 지부장, 목우회 강원도지회장, 강원미술대전 초대작가 등을 역임하며 지역 미술계를 이끌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빛나는 것은 붓을 잡은지 60여년이 지나 팔순을 넘긴 지금도 변함없는 창작에 대한 열정이다. 당뇨병 후유증으로 한 쪽 눈을 실명하고 다른 눈도 형체만 알아볼 수 있을 정도지만 단 하루도 드로잉을 쉬는 날이 없다.

경기도 양동이 고향인 이 화백이 원주와 인연을 맺은 것은 휴전 직후인 1954년. 서울대 미술대학 회화과를 졸업하고 공병장교로 원주에 근무하게 되면서다. 당시만 해도 원주는 이젤을 들고 밖에 나가면 측량사로 오해를 받았고 영화관 간판을 그리던 사람이 미술교사를 하고 있었을 만큼 현대회화의 불모지였다.

이 화백은 주말마다 군복 차림으로 현 원주기독병원 자리가 내려다 보이는 남산에서 그림을 그렸다. 젊은 청년장교가 그림을 그린다는 소문은 삽시간에 퍼졌고, 그림에 관심있는 청소년들이 모여들었다. 김기복 화백을 비롯해 이중남, 원한묵, 박순자, 노인선, 최명선 씨 등이 당시 이 화백을 따랐던 이들이다. 이들이 그림을 그리는 모습을 눈여겨 본 선교사가 현 청년관 자리에서 매달 전시회를 열어줬다. 이 화백은 당시 전시회가 원주 현대 회화전의 시발점이라고 기억한다.

1960년대 문총이 생긴 뒤에는 문총 설립자인 박일송 씨의 지원으로 현재 중앙로 구 중앙파출소 인근 사무실에서 '문총 미술반'을 열어 어린 학생들을 지도했다. 이후 작업실을 겸한 재환 회화연구소를 열었고 70년대 초반 강원감영 포정루 옆 자혜의원 3층에 원주 최초의 미술전문학원 '민 아뜨리에' 간판을 내걸었다.

민 아뜨리에는 가톨릭센터와 일산초교, 구 시청사 인근으로 자리를 옮겨가며 1995년 문을 닫을 때까지 25년간 수 많은 문하생을 배출했다. 작은아들 동훈 씨가 학원문을 닫으며 정리한 명부에는 무려 9천53명이 이 곳을 거쳐간 것으로 기록돼 있다.

현재 원주와 강원도 화단을 이끌고 있는 권대영 원주예총 회장과 김병호 강원미협 회장, 원종호 횡성 자작나무미술관장, 서양화가 양현숙 씨와 함태호 씨, 홍성훈 여주고 교장 등이 모두 이 곳 출신이다.

이 화백은 개인전을 열지 않기로도 유명했다. 평생 그림을 그렸지만 개인전은 1991년과 지난 2010년 두 번이 전부였다. "보는 사람의 마음에 들기 위해 그리는 그림은 사기야. 남에게 어떻게 보여질까 생각하는 순간 내 그림의 참 모습은 없다"는 게 이 화백의 설명이다.

이유는 단순했지만 후진들에게 전해지는 가르침의 울림은 컸다. 이 화백은 테크닉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부단한 노력과 마음의 바탕이 우선돼야 한다고 강조한다. "지금도 한달 만 그림을 그리지 않으면 일주일은 고생을 한다"고 토로하는 노 화백은 후배들에게 "사람과 자연에 대한 연민을 가지고 잠 자는 시간을 아껴 부단히 그려야 한다"고 이야기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제대로 된 그림을 그릴 수 없다는 것이다.

지난해 이 화백은 그동안 소장하고 있던 자신의 작품을 모두 역사박물관에 무상 기증했다. 작은 다락방 안에서 유화 350여점, 수채화 1천700여점, 드로잉 7천여점 등 5톤트럭 한 대분의 방대한 양의 작품이 쏟아져 나왔다. "내심 서운할 것 같았는데 오히려 마음이 편안해졌다"고 전한 이 화백은 "내겐 죽을 때까지 즐길 수 있는 일(그림)이 있어 부러울 것이 없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