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대면 '톡'하고 터져버릴 것 같았던 내 유년 시절의 추억

그 날도 어김없이 엄마한테 야단을 맞았다. 야단을 맞는 이유는 다양했다. 언니한테 대들어서, 동생을 괴롭혀서, 숙제를 하지 않고 놀아서 등등…. 나는 괜시리 심술이 나면 꼭 집 바로 옆으로 흘러가는 도랑물을 찾아갔다.

'에잇! 너라도 맛 좀 봐라. 내가 어디 혼자 당하기만 할 줄 아냐? 톡톡 다 터져 버려라! 모두 터져 버려라!' 그렇게 애꿎은 내 심술을 모두 받아주던 대상은 다름 아닌 도랑물 가에 곱게 핀 물봉숭아의 씨주머니였다. 나는 그렇게 해서 가운데에서 치이는 둘째의 설움과 마냥 놀고 싶은 내 마음을 고스란히 받아주었던 도랑물, 아니 정확히는 그 도랑물 가에 핀 물봉숭아와 친구가 되었다. 도랑물에는 물봉숭아 말고도 친구가 많았다.

가끔 나타나 날 놀래키던 갈색 등의 가재와 날씬하면서도 고운 자태를 자랑하던 눈부신 날개의 물잠자리, 내가 이름조차 알지 못하는 각양각색의 물풀들. 그래서 도랑은 또 하나의 내 놀이터였다. 요즘으로 치자면 심리치유센터이기도 했고, 그 중 으뜸은 물론 톡톡 터지며 내 모든 심술을 받아준 물봉숭아였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선생님의 추천으로 웅변대회에 출전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나는 선생님께서 나를 추천해주셨다는 그 우쭐함, 대회를 준비해야 한다는 부담감, 그리고 대회 출전을 앞두고 느끼는 긴장감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몰랐다.

그래서 나는 또 도랑가로 달려갔다. 곱게 핀 분홍빛의 물봉숭아는 내 우쭐함에는 칭찬을, 두려움에는 격려를, 긴장감에는 산들산들 흔드는 미소를 보내주었다. 연습하는 중간 중간 왠지 다른 사람에게는 보여주고 싶지 않은 그 모습을 나는 도랑물과 그 주변의 친구들에게는 보여줄 수 있었다.

'너희들에게는 어떤 모습도 보여줄 수 있어. 너희들은 내가 속상할 땐 나를 위로해주고 내가 기쁠 땐 함께 기뻐해 줄 수 있는 친구들이잖아. 얘들아! 내일이 대회인데 나 너무 떨려. 너희들이 내 웅변을 듣고 격려 좀 해주렴.'

유난히 수줍음을 많이 타던 나는 그렇게 도랑가에서 조심조심 몰래몰래 연습을 했다. 하루하루 달라지는 내 웅변솜씨에 물봉숭아들이 저절로 톡톡 터지는 씨주머니로 화답했다. 그럴때면 나는 깜짝 놀라면서도 금세 흐뭇한 웃음을 지었다. 나를 격려해주는 그 고운 물봉숭아에 감사하면서….

드디어 대회 날 아침. 나는 분홍 물봉숭아 빛이 도는 고운 브로치를 블라우스 가운데 꽂고 집을 나섰다. 대회장에서 내 순서를 기다리며 떨리던 순간에는 내가 지금 있는 곳은 대회장이 아니라 나만의 무대인 도랑가에 있다고 상상했다. 드디어 내 순서가 왔을 때 나는 긴장감에 다 외운 원고도 떠올리지 못할 정도로 눈앞이 깜깜해짐을 경험했다.

하지만 금새 정신을 차리고 다시 내 놀이터 도랑을 떠올렸고 이어서 도랑가의 주인공인 가재, 물잠자리, 그리고 물봉숭아를 떠올렸다. 그렇게 내 순서를 마치고 잠깐 동안의 결과 집계 순서도 흐른 뒤 나는 깜짝 놀랄 결과를 들었다.

장려상 입상! 평상시의 소심한 내 모습을 떠올리면 3등인 장려상은 정말 엄청난 성과였다. 집으로 돌아와 나는 으레히 그래야 하는 듯 당장 도랑으로 달려갔다. 물봉숭아는 나를 축하한다고 싱그러운 미소를 보내며 자신의 씨주머니를 아낌없이 내어주었다. 톡톡 터지는 물봉숭아의 씨주머니처럼 내 기쁨도 함께 톡톡 터지는 것만 같았다. 정말 싱그러운 여름날이었다.

그리고 내 유년 시절은 흘러갔다. 이사를 하고 중학교, 고등학교로 진학을 했으며 대학도 가고 결혼도 하고 아기도 낳았다. 도랑물도 물봉숭아도 그저 그런 평범한 추억이 되어 기억들 속에 묻혀 사그라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잔잔하던 내 일상에 파문이 일었다. 늘 우리 곁에서 듬직하게 버팀목이 되어주시던 아빠가 예고도 없이 하늘나라로 떠나셨다. 가슴이 찢어지고 하늘이 무너지는 슬픔 속에서 아빠는 우리가 유년 시절을 보냈던 고향땅 그곳 산기슭, 햇볕 잘 드는 양지바른 곳에 모셔졌다. 추운 날씨만큼이나 내 마음도 춥고 서늘할 수밖에 없었던 가슴 아픈 겨울이었다.

시간이 조금 흐르고 아픔도 아주 조금은, 아주 아주 조금은 무뎌진 것 같은 어느 여름 날 나는 아빠를 찾았다. 큰 길 옆에 차를 세우고 제수 용품을 들고 산으로 향하던 나는 뜻밖의 친구들을 만났다. 장마로 넘쳤던 도랑물을 수리한 가지런한 돌담들 속, 그 도랑물 속에 내 친구 물봉숭아가 한가득 피어 있었던 것이다.

진하게 붉은 혹은 분홍빛 수줍은 혹은 은은한 분홍이 도는 모습으로 말이다. 아빠께 인사를 드리고 내려오는 길, 나는 일부러 둑 아래로 몸을 숙이고 물봉숭아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들은 예나 지금이나 그 모습 그대로 나를 쳐다보며 위로해주고 있었다.

'내 씨앗을 터뜨리렴. 네가 언제나 그랬듯이 말야. 난 네 마음을 알아. 언제든 괜찮으니 기대렴.' 봉숭아 씨주머니를 톡 하고 터뜨리며 갑자기 눈물이 핑 돌더니 어느새 주르륵 흘러 내렸다. 나는 작은 위안을 얻었다. 그때 그랬던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