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라보예 지젝이라는 사람이 있다. 정신분석과 철학, 정치학, 경제학 심지어 영화와 음악 등 대중문화까지 넘나들며, 세계적으로 주목받고 있는 인물이다. 그가 자주 인용하는 재미있는 사례를 소개해보기로 한다.

자신이 닭 모이라는 망상에 사로잡힌 환자가 있다. 병원에서 치료받고 문을 나서다 공교롭게도 닭과 마주쳐 화들짝 놀라 병원 안으로 다시 도망친다. 의사 왈, 당신은 이제 자신이 닭 모이가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지 않나요? 환자의 대답, 예, 저도 잘 압니다. 근데 닭도 그걸 알까요?

이 사례를 해석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이 사람을 정신질환자로 보는 것부터 그건 바로 나다, 라고 생각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자 그렇다면 이 사람에게 자신이 닭 모이가 아님을 진정으로 믿게 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그것은 스스로 닭과 싸워 자신이 닭 모이가 아님을 자신과 타자 모두에게 보여 줄 때 이루어진다. 자신이 닭 모이인가 아닌가는 사전에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현실적 실천을 통해 사후에 수행적으로 결정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가 그렇게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참으로 우스운 얘기지만, 자기 스스로도 자신을 닭 모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의 무의식 속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그럼 그런 우스운 망상에 사로잡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사회가 자신을 닭 모이로 취급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니 사회가 자신에게 닭 모이 입장을 받아들이도록 강요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닭은 사회 현실로 대체된다. 정신분석에서 무의식은 순수 내면적 현상보다는 사회라는 외부 현실과 밀접하게 연결돼 있다.

우리 사회에서 논란이 되는 갑을관계 역시 이와 일맥상통한다고 생각된다. 을이 자신의 불평등하고 부당한 입장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은 자신이 아무리 법적으로 평등한 계약 관계에 있다고 생각하더라도, 자신보다 훨씬 큰 힘을 갖는 상대가 그걸 '모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가 자신을 을이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행동하는 것은 닭 모이 환자의 경우처럼 단순한 망상에서 비롯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갑이 그걸 강요하기 때문이고, 그러한 현실이 사회적으로 통용되기 때문이다. 이는 원주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대형마트와 중소 상인들의 관계에서도 그렇고, 원주의 중견기업들과 대기업 사이의 관계에서도 빈번히 반복되고 있다.

보다 원론적인 경우를 보자. 헌법에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규정돼 있지만, 문제는 권력자도 그걸 아는가, 라는 데 있다. 국가와 국민의 관계가 갑을관계가 아님을 국민은 잘 알고 있지만, 국가가 그걸 받아들이고 실천에 옮길 준비가 되어있는가의 문제이다.

이렇게 법과 사회 현실이 괴리되는 현상, 즉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까운 예들은 무수히 많다. 최근의 사례를 들자면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종북 좌파'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망상에 사로잡힌 사람이 있다고 하자. 쓸데없는 망상에 사로잡힌다고 타박할 때 이 사람은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예, 나도 내가 종북 좌파가 아니라는 걸 잘 압니다. 하지만 국가정보원에서도 그걸 알까요?

이것은 또한 학교폭력, 왕따가 발생하는 원인과도 연결된다. 성적으로 줄을 세워 모든 학생을 패배자로 만드는 사회구조, 사회적 질서가 있기 때문이다. 폭력과 괴롭힘을 당한 아이가 또한 폭력을 행사한다. 모든 아이들이 잠재적 닭 모이인 동시에 닭이기 때문이다.

나는 민주화 이후 변화하고 있던 국가와 국민의 관계가 다시 권위주의 시절로 복귀하는 게 아닌가라는 의혹을 지울 수 없다. 이것은 지방정부인 원주시청과 시민 사이의 관계에서도 반복되는 현실이라고 생각하기에 주의 깊게 성찰해 볼 필요가 있다.

그것이 특정 공무원, 특정 시민의 잘못된 의식 내지 망상에서 비롯되는 현상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사회적으로 반복 실천되고 있다는 점에 그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나 역시 내가 닭 모이가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지만, 내 앞에 버티고 서있는 상대방이 그걸 혹시 모를까 내심 걱정된다.

아니 사실 내가 더 걱정하는 것은 나도 모르는 새에 내가 상대방을 닭 모이 취급하지 않았나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