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 100여 년 전, 하버드대는 담장 밖 빈민가와 대학을 분리하기 위해 담을 겹겹이 둘러쌓았다. 그러나 치안은 갈수록 더 악화되었고, 대학은 이러한 정책이 큰 효과가 없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담을 허물고 시민을 대상으로 무료 교양강좌를 개설하는 개방정책을 시행하였다. 그 후 빈민가는 대학 인근에서 가장 안정되고 활력이 넘치는 지역으로 바뀌었다.

이러한 시도는 오늘날 더 이상 낯선 모습이 아니다. 기존 대학은 인적자원 양성과 지식창출이란 고유기능을 통해 지역사회와 상호작용해 왔으며, 최근에는 한발 나아가 대학 시설을 공공 편의를 위해 개방함으로써 큰 호응을 얻고 있다.

많은 대학이 시설 개방을 통해 지역사회와 소통의 계기를 마련한 것은 사실이지만, 환경개선에만 집중하고 물리적 장벽을 무너뜨리는데 그친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대학이 표방하는 것처럼 지역사회와 호흡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시설을 개방하는 행동에 집중할 것이 아니라, 개방된 공간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 고민할 필요가 있다.

닫힌 공간이 열리면 단절됐던 영역이 연결될 뿐만 아니라 새로운 만남과 소통이 이뤄진다. 그래서 열린 공간은 하나의 광장(Agora, 아고라)으로서 기능할 수 있다.

아고라는 고대 그리스 시민이 자연스럽게 모여 공동의 문제 해결을 위해 정보와 지혜를 나누던 의사소통의 장(場)이었다. 대학과 지역사회의 상호의존이 점차 심화되는 시기에, 지역의 현실을 진단하고 이에 따른 대학의 역할을 모색하는 담론의 장(場), 그러한 아고라를 구축하는 토대로서 시설 개방의 의의를 찾아야 한다.

대학이 물리적 한계 때문에 장(場)의 범위가 일정 영역에 그치다 보니, 이를 확장시켜 나가지 못하는 현실이다. 따라서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고 지역사회 전체를 아우르는 아고라를 형성하기 위해서는 흩어져 있는 장(場)을 하나로 연결하여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게 해야 한다.

평소 등산을 좋아하기에 주말이면 종종 치악산에 오른다. 길을 따라 걸으며 사람들을 만나고 스스럼없이 이야기를 나누는 가운데, 이따금 대학운영에 관한 아이디어를 얻는 기쁨을 누리기도 한다. 이러한 경험이 쌓여, 많은 지역주민이 자유로이 소통하고 생각을 나눔에 있어 길이 좋은 매개가 될 수 있단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이루어진 시도가 작년 이맘때 조성한 학내 둘레길이다.

비록 이 둘레길은 학내로 범위가 한정되어 아쉬움이 남지만, 길이 가지는 연결의 속성상 장(場)을 확장하는 근원이 될 것이라 믿는다. 이런 기대에 부응하듯이 우산동 주민센터가 장구봉 둘레길을 만들어 주민의 발걸음을 이끌고 있으며, 원주시는 올해부터 연차적으로 사업비 19억 원을 투입해 22.8km에 달하는 봉화산 둘레길을 조성한다고 밝힌 바 있다. 생각건대, 이러한 흐름이 이어져 지역사회를 아우르는 하나의 길이 형성된다면 어떨까?

원주시에 위치한 대학(전문대학 및 대학(원), 폴리텍)의 교지면적은 약 279만㎡로 원주시 토지의 0.3%를 차지한다. 반면, 학생과 교직원은 약 2만8천여 명으로 원주시 인구의 8.8% 정도에 해당한다. 그리고 인근 지역주민의 이용을 고려할 경우, 대학의 공간이 비록 큰 규모가 아닐지언정, 지역 내 상당수의 인구가 대학을 오갈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점을 미루어보아, 대학을 중심으로 소통 네트워크를 형성한다면, 단순히 공간을 연결하는 길이 아니라 지역사회 대다수가 참여 가능한 아고라로서 제 기능을 다할 것이라 본다. 길은 누구나 쉽게 다닐 수 있다. 또한, 많은 사람이 오가는 길은 커뮤니케이션과 교류를 통해 경험과 생각, 지혜가 쉼 없이 흐른다. 이제 길을 통해 소통의 장(場)을 잇고, 대학과 지역사회가 나아가야 할 길을 물을 때이다.

지리학자 에드워드 렐프는 '장소란 미래에 대한 희망의 현재적 표현'이라고 하였다. 열린 공간으로 주민에게 다가가는 대학의 모습은 지역사회와 상생하는 미래의 초석이다. 이제 시설개방이 갖는 소통의 의미를 응집하여 통합된 아고라가 만들어지길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