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주의 여성 인재를 키워 온 원주여고 교정이 하얀 목련으로 환하고, 분홍색 진달래로 다사롭다. 우리 딸이 4년 전 원주여고에 입학하고 나서 4월의 어느 날 학교를 방문했을 때 교정 풍경은 내 마음을 화사하고, 다사롭게 만들었다.

'우리 딸이 이렇게 다사로운 학교에서 공부하며 마음 따뜻한 사람으로 자라겠구나'라는 생각이 들며 마음이 따뜻했다. 그런데 학교에서 볼 일을 보고 돌아나오는 발길을 멈추게 한 '예지탑'에 새겨진 교훈 문구가 그 따뜻함을 앗아가 버렸다.

원주여고 교훈은 '참된 일꾼, 착한 딸, 어진 어머니'이다. 이 교훈에 담긴 인간상 혹은 여성상 3가지 '참된 일꾼, 착한 딸, 어진 어머니' 모두 아름다운 인간의 한 모습이다. 하지만 내 딸이 이런 교육적 철학 아래에서 교육받는 것이 달갑게 느껴지지 않았다. 교훈에 동의할 수 없었다.

우리 막내까지 다시 원주여고에 입학하면서 교훈에 동의할 수 없는 것에 대한 답을 알게 됐다. 첫째, 우리 아이가 타인의 삶의 보조자가 아닌 자기 삶의 주인공으로 살아가길 원한다. 자신의 삶을 행복하게 살아가기 위해 삶을 계획하며 결혼을 하거나 독신을 선택할 수도 있다.

'어진 어머니'이기 이전에 한 인간으로서 주체적인 자신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지혜를 배우길 기대하는 마음인 것이다. 내가 아는 원주여고 동문들 가운데 '어진 어머니'이기 이전에 한 인간으로서 행복하고 성공적인 삶을 살아가는 독신이 수 없이 많다.

문화 예술계, 정치·행정, 의학, 교육 분야 등 우리 사회 모든 분야에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며 행복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어진 어머니'가 아니면 원주 여고 동문이 될 수 없는 것일까?

둘째, 우리 아이들은 민주적 가치가 세상을 지배하는 사회에서 살고 있다. 남성 우월주의 사회가 아닌 양성 평등 사회에서 살고 있다. 그런데 원주여고 교훈은 유교적 남성 중심사회의 가치에 기초한 여성상을 강조하고 있다.

교훈이라는 것은 그 학교의 교육 주체인 선생님들이 학생들을 가르치는데 기본적 바탕에 깔려있는 교육적 철학에 해당된다. 그런데 그 교훈이 시대착오적이라면 교훈은 개정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원주 여고를 졸업한 우리 큰 딸이나 지금 다니고 있는 막내의 입장에서는 선생님들에게 '참된 일꾼, 착한 딸, 어진 어머니'를 철학적 바탕에 둔 교육을 받은 기억이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만나 본 원주여고 선생님들도 교훈을, 학생들에게 가르치고 싶은 철학적 가치관이라고 생각하는 분을 만나보지 못했다. 그것은 지금의 교훈이 시대착오적이기 때문이라고 본다.

셋째, 인간은 기업의 이익 창출을 위한 수단이나 도구가 아니다. 또 어떤 조직의 발전이나 그 조직의 목적 구현의 수단이나 도구가 아니다. 인간 자체가 목적이다. 즉 인간 자신이 자신의 삶을 위해, 자신의 행복을 위해, 자기 실현과 완성을 위해 살아가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참된 일꾼'이 되라고 가르치는 것도 산업화 시대나 전체주의 사회에서나 강조될 법한 인간상이라고 생각된다.

이런저런 이유로 원주여고 교훈이 교육적 가치관으로 좋다는 생각이 전혀 안든다. 얼마전 다행스럽게도 원주여고 학생과 학부모를 대상으로 교훈에 대한 적합도 혹은 교훈이 시대에 적합한 교육적 철학을 담고 있다고 생각하는지를 묻는 설문 조사가 있었다.

원주여고 구성원인 선생님들과 학생들 그리고 학부모의 의견을 조사했다는 것은 원주여고 교훈이 바뀔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 것으로 기대된다. 원주여고 동문들도 전통만을 강조하고 고수해야만 한다고 주장하지 말고 미래 시대를 내다보는 새로운 교육적 철학을 정립해 보는 것은 어떤지 심사숙고 했으면 좋겠다. 의견을 폭넓게 수렴하기 위해 여론조사를 해보는 것도 좋은 방안의 하나가 아닐까.

산업화는 극에 달했고, 자본주의는 이제 새로운 경제 이념을 요구하고 있으며, 지구는 이미 통신과 교통 수단 발달로 지구촌이 됐다. 즉 글로벌 시대가 된지 오래다.

지구가 환경오염으로 병들고, 물질만능주의로 황금의 가치가 세상 모든 것을 지배하면서 인간이 소외되는 시대가 된지도 오래다. 우리가 꿈꾸는 미래와 바람직한 인간상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이에 적합한 인간을 길러내기 위한 교육적 철학이 담긴 교훈이 새롭게 제정되길 소망한다.

학교 이전에 맞춰 교훈 선포식을 갖는 역사적 사건을 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이를 통해 지역사회의 교육적 지향점을 어디에 둬야 할지에 대해 생각해보는 계기가 마련될 것이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