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우내 움츠렸던 어깨를 펴고 새댁들의 나들이가 있는 오늘은 햇살까지 따사로웠다. 좀 큰 아이들은 학교나 유치원으로 작은 아이들은 품에 안고서 친정엄마 자가용을 타고 모처럼 외출을 서둘렀다. 오늘은 부녀회에서 하는 고추장 담그기가 약속 된 날이다.

만나자 마자 그동안 못 나누었던 이야기들을 모국어로 수다 떠는 그녀들이 새삼 사랑스러웠다. 엄마들에게 충고를 들어가며 말이나 한국 음식을 금방 따라하는 그들은 여느 딸과 별반 다르지 않아보였다.

지금은 많이 퇴색되었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유교적인 남아 선호사상이 지배적이던 때가 있었다. 그 여파 때문인지 남녀 성 비례가 불규칙해졌고 결혼 적령기를 넘긴 총각들을 주변에 흔히 볼 수 있다. 결혼이민자라는 낯선 이름을 달고 농촌에 시집온 새댁들을 쉽게 접하게 된 것은 결코 우연은 아니라고 본다.

불과 30~40년 전만 해도 마을에서 외국인 여성을 보는 일은 그리 흔하지 않았다. 한때 호저면에서는 베트남, 필리핀, 태국, 일본 등 여러 나라에서 온 나이 어린 여성들이 많았다. 처음부터 그들과 친숙해진 것은 아니었고 모 대학 교수님과 관내 보건소장님이 연계된 이민자 사업 중 하나로 어색하게 만났다.

지역주민과 그녀들이 함께 어울리며 멘토링 했던 것이 발전해 지금의 호저마을춤으로 승화되었고 이제는 없어서는 안 될 지역 문화로 자리매김 되었다. 그러다가 부녀회장님들이 딸과 친정엄마로 만나는 자리를 만들었고 결연증서를 교환한 것이다. 남편에게 말 못하고 외로웠을 그녀들에게 친정엄마와 딸은 친분을 나누었고 측은지심으로 변함없이 지낸지도 꽤 오래 되었다.

예쁘게 가정을 꾸미고 자녀를 낳아 기르며 열심히 살겠다는 희망으로 머나먼 가족을 멀리하고 이국땅으로 온 그녀들의 삶은 생각보다 힘들었나보다. 아이들은 커가고 농사만으로 힘들어 직장 생활에 살림, 가장 역할까지 감내하다 헤어지는 부부가 생기기도 했다. 본국의 식구들에게 용돈을 부쳐야 한다는 이유로 직장을 찾아 가출한 새댁도 있다.

꽤 괜찮은 친구가 하나 있었다. 성격이 사근사근하고 동네에서 제일 젊은 새댁이라 시댁은 물론 엄마또래 아줌마들의 귀여움을 독차지 했다. 그러나 겨울에 회관에서 하는 농한기여성프로그램인 다이어트 댄스에도 열심이던 그녀에게 찾아온 불행은 모두를 안타깝게 했다.

삼십대의 젊은 남편이 회사에서 사고로 죽은 것이다. 그래도 본국으로 가지 않고 부모님 모시고 살겠다는 고운 마음의 그녀를 정 떼느라 모두 힘들었단다. 이곳에서 배운 언어로 관광가이드를 하며 잘 살고 있다고 지금도 연락하며 딸처럼 지낸다고 했다.

베트남에서 온 우리 딸은 호저면에서 제일 예쁘다. 남편의 직장을 따라 시내로 나갔는데 아이들을 훈육하면서 남편과 시댁에 잘하는 만점짜리 며느리다. 다들 아이들 키우면서 직장 다니면서 더러는 농사지으며 나름대로 열심인 그녀들은 어쩌면 되바라진 자국의 아가씨들보다 낫다.

친정엄마로 추천한 옆집 친구가 맺은 딸은 나이가 별로 차이가 나지 않는데도 꼭 엄마라고 부른다. 그녀의 사업가 기질은 모두의 감탄을 자아낸다. 처음에는 비닐하우스를 이용해 자기네 나라의 채소를 키워 저와 같은 이민자들에게 내다 팔더니 이제는 제나라에서 뭐든 들여와 키우고 가공해 이익을 창출하는 것이다.

우리 전통문화 체험으로 봄이면 장을 담그고 여름이면 장아찌를, 가을이면 추석송편을 빚고 겨울에는 온 가족 모두 문화 탐방 시간을 가지면서 일 년에 몇 번이나마 하는 그네들과의 시간이 이제 기다려진다. 윷놀이나 체육대회 때 혹은 마을 행사 때, 속으로는 여러 가지 애로사항이 있을 테지만 겉으로는 언제 어디서 만나도 밝게 웃으며 인사를 건네는 젊은 그녀들이 행복했으면 좋겠다.

다문화의 교류라는 어쩔 수 없는 시대적 흐름 속에서 돈으로 팔려온 후진국의 여자들이 아닌 당당한 이 땅의 엄마로 기여해주길 바래본다. 단일민족을 아무리 고집한들 변하는 게 없으니 차라리 속편하게 수용하고 그네들과 함께하며 2세까지 다독이는 현명한 사회를 이루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한통 가득 채워 보낸 고추장을 직접 버무려 만들었다고 자랑하며 식구들과 보낼 그녀들의 집안이 정으로 가득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