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 너두 빨갱이지?"
"아니야, 나 빨갱이 아니야."
"야, 너두 성당 다니잖아. 얘, 천주교 맞지?"

때가 꼬질하게 묻은 소매 끝 실단이 풀어지고 팔뚝은 땟국물로 절여진 듯 반질반질하고 얼굴은 햇빛속에서만 신나게 뛰놀아 검게 그을린 황금빛 얼굴에 개궂한 남자 아이들 몇이 동네 어귀에서 큰 일이라도 난 듯 내 앞을 가로 막는다.

내가 성당에 다니는 애 맞다고 지목해서 앞장서서 달려온 머슴애는 옆으로 비껴서서 말은 못하고 큰 눈망울만 여러 번 굴리다가 누런 콧물이 여러 번 올라갔다 내려왔다 할 때마다 손등으로 슥슥 닦았다.

심각한 듯 조금은 무슨 큰 비밀이라도 캐내려는 듯 어디 제대로 불기만하면 순사한테 바로 끌려가야 마땅하지만 좀 봐주기라도 하는 표정으로 나를 다그쳐왔다.

"거봐라, 안다닌다고 말 못하잖아. 얘, 맞아."
"아니야, 아니래두. 그냥 엄마랑 미사 간 거야. 니들 정말!"

순간 내 작은 얼굴이 서산 너머로 지고 있던 저녁노을보다 더 붉어졌는지 모르겠다. 귀까지 벌겋게 달아오르며 분하고 약이 올랐는데 다른 것도 아닌 무시무시한 빨갱이란 말에 그만 어찌 더 싸움을 못했는지 모른다. 그즈음 나는 '천주교=불온한 사람들'이란 공식의 얘길 여러 차례 귀동냥으로 들었던 것이다.

언젠가는 수 천명의 사람들이 원주역부터 원동성당까지 구름처럼 바다처럼 인산인해를 이루고 누군가는 자기 옷을 벗어서 길에다가 융단처럼 깔았다고도 하는 소리가 전설처럼 들렸었다. 집에서는 아버지가 성당에 엄마가 나가는 것이 못마땅해서 텔레비전 뉴스에 어떤 신부님들이 나올 때면 불편해 하는 것을 들었다.

또 동네 할아버지 몇 분들도 담뱃재를 탁탁 털어내면서 "망할징조지 망할려구 저러지. 왜 신부들까지 빨갱이한테 미쳐서 저래. 나라꼴이 뭐가 될려구 그냥 종교인답게 교회 안에나 있을 것이지 원…" 동네 어르신들까지도 가끔 무서운 얼굴이 되곤 했다.

그 시절 국민학교라 불리던 초등학교에서는 주기적으로 반공 포스터와 표어를 작성해서 제출해야 했었고 우리는 '무찌르자 공산당, 때려잡자 공산당' 이런 표어를 신나게 외치며 다녔으며 고무줄 놀이할 때도 재밌게 부르며 놀았다.

교내 전시회에서 어떤 언니가 그려서 1등한 포스터에는 시커멓고 힘찬 군화 발에 찍 눌려서 '버둥버둥' 거리고 있는 조금은 우수꽝스럽게 생긴 뿔이 여러 개 달린 빨간 도깨비 괴물이 있었는데 우리는 모두들 빨갱이는 저렇게 온몸이 빨갛고 뿔도 난 줄 알았었다.

암튼 빨간색은 불온했고 빨갱이는 무섭고 위험하고 겁나는 두려운 존재였던 것이다. 70년대 중. 후반, 아주 어린 유년시절 그즈음 나는 정확하게 알 수 없는 뭔지는 모르지만 무겁고 어둡고 음습한 그리고 누군가 죽게 될까봐 엄마들이 성당에 모여서 기도하고 걱정하는 분위기 속에서 묵직한 공포를 몸으로 느꼈었다.

얼마 전 밝음신협 건물 2층에서는 지학순 주교님 선종 20주년을 맞아 매주 진행한 '정의가 강물처럼' 특별 강좌가 있었다.

세상의 불의 앞에 어찌해야 하는 지 온몸으로 보여주셨던 원주교구 초대 교구장 지학순 다니엘 주교님! 엄혹한 세월, 자신의 몸을 던져 닫힌 교회의 문을 열고 벽을 허물고 정의로운 세상을 위해 가난한자와 박해 받는 자, 낮은 곳에 있는 이들의 손을 잡아 주시고, 진정한 양심선언이 무엇인지 길을 보여주신 분! 일생동안 당신의 사목 지침 빛이 되라!를 교회에서 교회 밖 세상에서 실천으로 보여주신 분! 진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고 맨 앞에서 걸어 가셨던,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세상을 보여주고 싶으셨던 분!

원주를 깊이 알아갈수록 원주를 지키고 만든 진짜 어른들을 알아갈수록 나의 고향이 원주라는 것이 내가 원주에 살고 있다는 것이, 그간의 고단했던 역사조차도 참으로 감사하다.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해야 할까? 정의는 강물처럼 흐르고 있는 걸까? 그런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