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가 제법 쌀쌀합니다. 아이들은 교복위에 저마다 겉옷을 하나 더 여몄습니다. 교정에는 분홍빛 진달래꽃대신 겨울을 준비하는 색들로 물들어가고 있습니다. 하늘은 조금 더 높아졌고, 산들은 조금 더 다채로워졌습니다. 가을은 이토록 아름다운 시간을 물들이기 위해 찾아왔습니다. 아마 그 시작은 우리가 갈 수도, 볼 수도 없는 위로부터 이곳까지 왔겠지요.

가을이 왔다는 것은 참 분명한 사실입니다. 하지만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정확히 이야기하라면, 아마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나누어진 우리나라의 북쪽도 어린 우리들에게는 그런 의미가 아닐까 싶습니다. 우리나라의 반쪽이라는 사실은 분명하지만, 쉽게 와 닿지는 않으니까요.

너무나 오랜 시간, 철책을 가운데에 두고 살아온 탓일까요? 한때는 자유로웠던 왕래를 기억하는 이들이 떠나버렸기 때문일까요? 더 이상은 그곳을 고향으로 기억하지 않는 세대가 이미 와버렸기 때문일까요? 우리나라 반쪽, 북한은 같은 민족끼리도 차마 쉽게 말할 수는 없는 곳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어느새 삶의 한쪽 귀퉁이에 밀려나있습니다. 아이들은 이제 더 이상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고 노래하지 않습니다. 매서운 추위는 아름다웠던 것들을 몰아내어서 자꾸만 옷을 껴입게 만들어 버립니다.

모든 것을 홀가분하게 벗어버리고, 훌훌 털어버리고 예쁜 맵시를 드러낼 수 있다면 참으로 기쁠 텐데요. 이렇게 가을이 저물어갈 무렵, 살을 더 깊숙이 파고들려고 하는 바람들에 우리는 꽁꽁 싸맬 수밖에는 없습니다.

날이 좀 따뜻해지기를, 다시 꽃이 만개하기를 기다려야만 하는 걸까요? 21세기, 세계유일의 분단국가 대한민국. 'North or South?'라고 물어야만 하는 나라 대한민국. 아직도 허리를 끊어놓은 상처를 치유해주지 못한 채, 너무나 다른 모습으로 너무나 다른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의 시작은 모두 같았을 텐데 말입니다.

이야기를 나누며 살아가야겠다고 저는 다짐해왔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한국적인 이야기로 승부를 보겠다고 단단히 벼르러왔습니다. 근데 그런 제 눈에는 갈라진 저 위쪽의 땅과 이 아래쪽의 땅이 그렇게 마음 아플 수 없습니다.

'이승복 기념관'에 소풍을 가고, 10년의 교과서는 매번 다른 말들을 풀어놓고 있습니다. 터져버린 사건에 대한 폭발적 관심은 어느 순간 미온해지더니, 그 온도를 잃어버리고 맙니다. 단지 갈렸다는 이유하나로 우리는 너무 많은 것들을 잃어버리고, 불분명해져 버리고만 것입니다. 그게 한국의 이야기를 꿈꾸는 사람에게는 너무 가슴 아픕니다.

지금 함께 시간을 공유하고 있는 백두대간위에 살아가는 이 땅의 사람들은 전혀 다른 시공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한국의 이야기는 하나여야만 합니다. 한국의 이야기는 하나의 목소리로, 하나의 사람들로, 하나의 땅으로, 하나로부터 전해져야 합니다. 그래서 마침내 세상의 가장 평화로운 방법으로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은 역사여야 합니다.

제가 꿈꾸는 삶의 책 한 부분에는 2050년 6월 25일이 제법 방대한 분량을 차지한 채 비어있습니다. 그날은 제 손으로 '공존과 평화'라는 주제로 통일엑스포를 꾸미고 있을 날이니까요. 세계의 모든 공존과 평화를, 저는 그 자리에서 자랑스러운 통일 대한민국의 이름으로 가꿔내고 싶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시작해왔던 하나의 것을 삶에 한 부분에 채울 자리를 만들어야 합니다. 제가 2050년의 6월 25일을 마련해놓은 것처럼 말입니다. 그날은 가을처럼 알지도 못하게 와서 온 세상을 아름답게 물들이고 있겠지요.

옷은 좀 가볍게 입고, 예쁜 맵시를 드러내고, 그 아름다움을 자랑하듯 세계의 길을 환하게 걸을 수 있으면 참으로 좋겠습니다. 백두대간의 사람들이 모든 시간을 공유하고, 다시 역사를 새우고, 너무나 많이 비워져있는 책의 한 장 한 장을 희망으로 채워 가면 참으로 좋겠습니다. 끝내, 공존과 평화의 목소리를 드높일 수 있는 한줄기 빛이 되었으면 참으로 좋겠습니다.

교정에는 다시 분홍빛 진달래들이 찾아올 것입니다. 잔뜩 껴입어 뒤뚱이던 아이들은, 홀가분하게 벗어던지고 활보할 것입니다. 그곳의 아이들은 아름다운 맵시를 뽐내며, 한 목소리로 노래할 것입니다. '우리의 소원은 이루어졌습니다. 우리는 소원은 통일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아이들은, 한 때는 다른 국가였다는 것을 점점 잊어갈 것입니다.

그 다음 아이들은 모든 것을 잊고 하나의 대한민국만을 바라볼 것입니다. 그 다음 아이들은 한반도의 찾아온 단 하나의 가을을 깨달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