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숙 끝내고 전셋집 마련
공부에 푹 빠진 천건남 씨

천건남(72, 판부면) 씨는 3년6개월의 노숙생활 끝에 지난달 전셋집을 장만하고 떨어져 지내던 아들을 데려왔다.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아무것도 없이 무기력하기만 했던 천 씨에게 다시 삶의 의지와 즐거움을 안겨 준 것은 다름 아닌 '공부'였다.

지난 2002년 건축현장에서 일을 하다 사고를 당해 병원에 입원했고, 그 후 다리와 허리를 쓸 수 없게 됐다. 수년간 병원에서 생활하며 치료를 이겨냈고, 그러는 동안 정신이 온전하지 못했던 아내는 곁을 떠났다. 다리에 인공관절을 넣은 채 목발을 의지해 병원에서 퇴원했지만 갈 곳도, 먹고 살 일도 없어져 노숙인 신세가 됐다.

다행히 주변의 소개로 갈거리사랑촌(원장: 곽병은) 원주노숙인센터를 알게 됐고 그때부터 센터와 무료급식소 십시일반을 오가며 숙식을 해결할 수 있었다. 천 씨는 "병원에서 나와 오갈 데가 없었으니 그때는 참 힘든 시간이었다"며 "그래도 노숙인센터에 신세를 지고 정착하면서 마음의 안정을 찾게 됐다"고 말했다.

그렇게 먹고 자는 일이 해결됐지만 천 씨는 하는 일 없이 지내는 삶에 무력감을 느꼈고, 신부님과의 대화에서 취미를 갖기를 권유 받은 후 십시일반에서 들은 강의를 통해 '공부'를 취미삼기로 마음먹었다. 천 씨는 "공부라고는 평생 제대로 해 본 일도 없었고 처음 노숙인센터에 왔을 때도 생각지도 않았었다"며 "당시 문화교실 강의에서 강사선생님이 '배우는 일에는 나이 제한이 없고, 죽을 때까지 해도 모자란 게 배움이니 공부를 시작하라'고 해 공부에 마음을 붙이기로 했다"고 말했다.

천 씨는 아들이 다녔던 누리야학에 찾아가 공부를 시작했고, 3년이 지난 지금은 고등과정을 배우며 최고령자로 만학의 열의를 보이고 있다. 낮 시간에는 조용히 공부할 수 있는 공간이 마땅히 없어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책을 펴고 복습했다. 천 씨는 "여름부터 10월까지는 강원감영 안에 시원한 그늘에서 공부를 했는데 공부하기 참 좋은 명당이었다"면서 "겨울에는 주로 보건소 로비에서 공부했다"고 설명했다.

그렇게 매일 평균 6시간 정도 공부하며 시간이 지날수록 재미에 빠져 이제는 공부하는 시간이 천 씨에게 가장 기쁜 시간이고, 그래서 지금이 자신의 삶에서 가장 감동스러운 시절이 됐다고 한다.

천 씨가 지금 만족스러운 삶을 사는 또 하나의 이유는 아무런 능력도 없는 자신의 처지에서 전셋집을 장만했기 때문이다. 동주민센터를 통해 무주택자에게 주택마련의 기회를 제공하는 사업에 신청서를 냈고 9개월 만에 통과 소식을 들었다. 수급비 등 생활비를 아껴서 모은 돈 90여 만원과 갈거리협동조합에서 200만원의 전세금 대출을 받아 지난달 판부면 서곡리에 집을 얻었다.

또한 아들 셋 중 둘은 제 갈 길을 가고 왕래가 없이 지내지만 친척집에 맡겼던 지적장애 3급의 막내아들을 집으로 데려와 함께 생활할 수 있게 됐다. 천 씨는 방 하나 갖고 있다는 것, 능력이 없는데도 이렇게 전세금 대출을 받았다는 것, 장애가 있고 늙었는데도 공부를 할 수 있는 것, 못 움직이는 사람도 있는데 목발을 짚고라도 다닐 수 있는 것 등 모든 것이 기쁘다고 말했다.

천 씨는 지금도 아들과 함께 십시일반에서 식사를 해결하고, 야학에서 열심히 배우며 특히 수학에 가장 큰 재미를 붙이고 있다. 시간이 지나 공부도 더 많이 하고 여력이 생기면 노숙인센터와 십시일반에서 노숙인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의지를 갖도록 이끌어주는 봉사를 하다 생을 마감하는 게 천 씨의 꿈이다.

천 씨는 "나도 전에는 술을 많이 마셔봤지만 술을 자제하는 게 노숙인들에게 가장 우선이라 사람들이 술을 자제하고 의지를 갖도록 돕고 싶다"며 "사오십대만 돼도 늙어서 공부를 못한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나처럼 칠십 넘은 사람도 잘 할 수 있으니 자포자기 하지 말고 공부를 시작했으면 한다는 얘기를 해주고 싶다"고 말했다. 또한 "갈거리사랑촌과 누리야학에 고마운 마음이 크다"고 덧붙였다.

갈거리사랑촌 곽병은 원장은 "집을 장만하고 가장 좋은 점이 뭔지 여쭈었더니 책상을 갖게 된 게 가장 기쁘다고 대답하는 것을 들으며 훌륭한 분이라는 생각을 했다"면서 "이렇게 노숙인센터를 통해 도움을 얻고 용기를 내시는 것을 보며 큰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한미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