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추운 날 생각지 않던 한 통의 소식을 들었다. "아빠가, 오늘 떠나셨어." 절친한 친구의 문자 한 통, 나는 다음날 원주로 갔다. 마음이 아릿한 것이 스산해졌다. 추위 때문인지 허기가 졌다. 빈 속을 채울 우유를 한 통사고 마시는 데 뒤에 쓰여 있는 '원주'라는 두 글자가 보였다. 원주, 태어나 처음 밟는 땅의 목적이 조문이라니 서글펐다.

분명 나는 눈물이 나지 않았었다. 담담히 받아들이고 있다고 자만했었다. 하지만 상복을 입은 친구 앞에서 나는 울어버렸다. 무너져 버린 것이 맞는 표현일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나는 무방비로 죽음 앞에 벗겨져 놓여 있었다. 울고 또 울고 내가 나를 이해할 수 없던 시간이 흐르고 나는 장례식장을 나왔다. 친구를 힘껏 안아주고 "괜찮다고, 잘 했다고, 잘 버텼다고" 밖에 말 할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검은 상복에 싸여진 작은 등을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할 수 없던 그 순간 터미널 앞에서 봤던 '박경리 문학공원'이란 글자가 떠올랐다. 그곳이 어디든 가야했다. 위태로이 흔들리는 내가 갈 곳은 그뿐이었기 때문일까. 물어물어 버스에 몸을 싣고 생각에 잠겼다. 살고 죽는 일과 나를 찾아야 한다는 걱정 미래에 대한 끝없는 자문 속에서 도착한 그곳은 고요했다.

방문객은 나 홀로였다. 죽음처럼 쓸쓸한 혼자였다. 그가 꾸몄다는 길을 지나 그의 손길이 스민 생가를 넘고 그의 소담함을 닮은 동산에 올라 한번 둘러봤다. 작고 예쁜 그곳에서 세련된 건물 한 채가 보였다. 건물을 향해 걸으며 그의 소리가 담긴 시를 읽었다. 그는 이곳에서 어떻게 살았을까 라는 질문을 하며 들어간 문학의 집은 토지와 그를 말하고 있었다. 그의 역사적 연혁과 문학적 자취와 작품에 대한 소개 그리고 그의 분신과도 같은 토지를 소개했다.

관람 안내를 부탁하고 보게 된 영상에서 나는 내가 온 이유를 찾았다. 문학과 자연 그리고 인간과 자연의 하나 됨을 말하고 있는 그는 편안했다. 하고 싶은 말이 있거나 사명감 있는 모습이 아니었다. 자신이 몸으로 체득한 사실을 기나긴 겨울밤 옛이야기를 들려주는 엄마처럼 조곤조곤 풀어내고 있었다. 오롯한 창작의 자유를 위해 스스로 택한 외로움에서 그는 자연의 소리를 들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는 나에게서 자연, 생과 사(生과死)의 순환과 만물의 순리, 모든 생명의 존엄 그러한 진리가 지닌 법칙 속에서 모든 것을 빌려 살아가는 인간의 미혹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가, 무엇을 두고 살아가야 할 것인가에 대한 본원적인 자문을 끌어냈다. 그러한 과정은 죽음과 삶의 경계선상에서 죽음과 삶을 다시금 직시하게 만들었다.

죽음은 결코 두려운 것이 아니며 외로이 홀로되는 것이 아니다. 사는 동안의 노고와 결과를 통해 죽음을 지나 다시금 기억되는 것, 그것이 죽음이었다. 사라진 육신이 아닌 남겨진 그의 혼이 담긴 것을 기억하는 한 죽는 것이 아니다. 결코 죽음은 쓸쓸히 잊혀지는 것이 아니므로. 그가 생전에 생활했던 작은 부엌과 그가 집필했을 방안에서 나는 그를 느꼈다. 그는 생가의 따스함과 손때 묻은 물건 그리고 그의 사상이 담긴 여러 작품 속에서 다시금 내게 살아났다.

며칠 뒤 다시 친구를 만날 것이다. 웃음으로 아버지의 죽음을 잊으려 노력할 친구에게 나는 말할 것이다. 흔히 하는 말로만 너의 마음속에 아버지가 살아계시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를 꼭 닮은 네가 여기 이렇게 아버지를 기억하고 있는 한 너의 아버지는 영원히 죽은 것이 아니라고 말이다.

글을 쓴다는 것이 멀게만 느껴지는 문학도에게 응원을 건네준 그의 문학공원은 곧 그의 숨결과도 같았다. 누구나 힘들 때면 기댈 곳을 찾는다. 나는 그날 문학공원에서 내 쉼터를 찾았다. 그의 손이 닿아 숨결이 스며있는 공원은 살아 있는 공간이었다. 그의 작품이 잊혀 지지 않는 한 그는 문학과 함께 살아있을 것이다. 내 마음 속에서도 누구에게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