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지대학 교수가 되어 고향 부여를 떠나올 때 선친께서는 필자에게 숙제 아닌 숙제를 주셨다. "너의 18대조인 경호(敬胡)공 휘 흥(興) 선조의 공덕비나 선정비가 원주 어딘가에 있을지 모르니 찾아보라"는 것이었다.

흥 선조는 필자의 본관인 남양(南陽) 전(田)가의 중흥시조로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태종과 세종시대에 원주목사(현 원주시장), 형조좌참판, 판한성부사(현 서울시장) 등 크고 작은 벼슬을 거쳐 판중추원사를 끝으로 공직에서 은퇴하신 후 충청도 석성현(지금의 충남 부여군 석성면)에서 머물며 말년을 보내셨던 것이다. 그는 1457년(세조 3년) 4월 24일 82세로 사망하셨고 세조로부터 시호를 경호(敬胡)로 받았으며 국가에서 예장(禮狀)했다.

선친께서 위와 같은 숙제를 주신 까닭은 흥 선조께서 원주목사시절 선정을 베푸셔 모범적 목민관으로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이 지은 「목민심서」에 기록되었기 때문이다. 목민심서에 소개될 정도로 백성을 생각하는 어질고 자애로운 목민관이었다면 그를 기리는 비가 있을 것이라는 것이 선친의 말씀이었다.

원주생활에 익숙해지던 1986년 어느 날 숙제를 해결할 목적으로 원주문화원을 찾았다. 방문목적을 당시 원주문화원장(황주익)에게 설명하고 나니 "설령 비가 있었다 해도 원주라는 도시의 특성상 그 비가 남아 있기는 어려울 것이다."고 말해 실망을 금치 못하였다. 황 원장은 "거의 600년 전 일이고 우리나라 사람들의 족보에는 과장과 허위가 많으니 우선 흥이 진짜 원주목사를 지냈는지부터 확인해 보라"는 것이었다.

필자는 원주문화원이 발간(1976년)한 「원주·원성 향토지」에 역대수령 및 도지사 명단(176쪽)에 전흥을 발견했다. 그 때의 흥분과 놀라움을 지금도 간직하고 있다. 우리 가문의 족보가 허위가 아니라는 점, 그리고 기록의 위대함 때문이었다. 그 후 황 원장의 한 마디가 영향을 미친 탓일까 흥 할아버지의 원주목사 재임 기록을 확인한 것으로 숙제를 거의 포기한 채 세월을 보냈다.

그런데 금년(2011년) 여름 우연한 기회에 원주시에서 원주사료를 건곤감이(乾坤坎?) 4권의 책으로 나누어 2003년 발간한 「원주지」(原州誌; 김성찬 역주)를 보게 되었다. 마음과 머릿속 어딘가에 잠재해 있던 숙제가 다시 떠올라 관심을 갖고 들추어 보았다. 원주지(坤) 268쪽에 "전흥 판원주목사를 지냈고, 거사비가 있다.(田興判原州牧有去思碑)"라는 글귀가 눈에 확 들어온 것이다.

흥 할아버지의 비가 있을 것이라는 선친의 추측이 정확히 맞았음을 보여주는 기록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비록 그 비는 지금 어디 묻혀있는지 알길 없지만 비가 있었다는 사실이 확인된 셈이다. 흥 선조는 성정이 어진 목민관이었을 뿐만 아니라 청렴결백한 관료였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기대를 걸고 나머지 3권의 책을 살펴보니 「원주지」(乾) 85쪽엔 「신증동국여지승람」원주목 편의 주요 벼슬을 지낸 사람의 명단인 명환(名宦)란에 조선의 첫 인물로 흥 할아버지가 올라 있었다.

그 내용은 '전흥 판원주목사를 지냈다. 성품은 남을 불쌍히 여기며 용서하기를 좋아하여 매번 사람에게 때리는 형벌을 집행하는 자리가 있을 때 태(苔)한 대도 함부로 때리지 못하게 하였다(田興判原州牧性矜恕每刑人爲之設席不濫一笞)'는 것이었다. 128쪽엔 「동국여지지」 원주목 편에 위와 유사한 내용이 기술되어 있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또한 「원주지 」188쪽에는 강원도지(江原道誌) 원주군편 각 관아의 전임관원의 이름과 관명 등을 기록한 군선생(郡先生)란의 조선의 인물 중에 흥 할아버지가 올라 있었다.

흥 선조의 비를 찾으라는 선친의 숙제 속에 숨겨진 더욱 깊은 뜻은 우리 남양 전가의 확실한 뿌리를 찾고 싶은 것이었다고 본다. 우리 족보에는 흥 선조의 선친 휘 득우(得雨), 조부 휘 주(柱)를 기록하고 증조 이상 4대를 공란으로 비운 후 시조는 휘 풍(豊)으로 나타내고 있기 때문이다. 일종의 미스터리에 속하는 것이다. 흥 선조는 고려가 조선으로 나라가 바뀌는 격변과 혁명의 시대를 살았던 인물로서 증조 이상을 밝히지 못하는 말 못할 숨은 사연이 있을 것이다. 따라서 흥 선조의 비(碑)를 찾는다면 그 곡절을 알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숙제에 담겨 있다고 본다.

흥 선조의 거사비가 있었다는 기록을 발견했으니 선친이 내리신 숙제의 반을 푼 셈이다. 선친이 생존해 계셨다면 얼마나 기뻐 하셨을까? 산 설고 물 설은 타향 원주에서 30년 가까운 세월을 보내면서도 필자는 흥 선조와의 연을 떠올리며 결코 낯선 땅이 아니라 생각해 왔던 것이다.

자애로운 성정으로 백성을 사랑했고 청백리로 모범적 목민관이었던 흥 선조의 숨결을 문득 문득 느끼며 생활을 하고 있다. 필자의 자녀들은 원주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니 그들에겐 원주가 고향이 될 것이고 틀림없는 원주사람으로 남을 것이기에 이와 같은 글을 남겨두고 싶다.

이제 남아있는 숙제의 절반을 완성할 차례다. 원주 땅 어딘가에 있을 자랑스러운 흥 선조의 거사비를 찾아나서야 한다. 급한 마음에「원주지」의 역주자인 김성찬(원주시 문화관광과)님께 조언을 구했다.

"거사비가 보존되고 있다면 지금의 원주시 지역보다는 주천에 있을 가능성이 있다"는 그분의 의견에 희망을 걸고 틈을 내어 주천에 가 볼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