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고 푸른 가을 하늘을 따라 차를 몰고 북원주 방향으로 향했다. 길지 않은 시간을 달려 한적한 시골길에 접어들었다. 길가에 코스모스가 피어 시골길의 단아함에 한껏 멋을 내주고 있었다. 그 길이 마음에 들어 따라가다 보니 '고산마을입니다'라는 마을 표지석을 볼 수 있었다.

웅장하고 우람한 바위 장군처럼 마을 입구를 지키고 있었다. 조금 더 가까이에서 보려고 길가에 차를 잠시 세웠다. 큰 바위 마을 표지석의 위압적인 모습에 입을 다물지 못하고 위로 한참을 올려 보았다. 마을입구를 안내하는 표지석을 보고 있자니 고산마을 주민들의 마을 사랑을 첫눈에 느낄 수 있었다. 표지석 주위를 둘러보니 그야말로 아름다운 전원모습 그대로였다.

이때 무려 7~8미터나 되는 거대한 마을 표지석에 묻혀있는 작은 비석 하나를 바로 옆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이 작은 비석은 거대한 표지석 규모에 눌려 볼품없어 보일 정도였다. 그러나 그 작은 비석의 글귀를 따라 읽으면서 이 마을에는 정말 존엄한 역사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무위당 장일순 선생님이 쓰신 해월 최시형 선생님을 기리는 기념비로 '모든 이웃의 벗 최보따리 선생님을 기리며'라고 쓰여 있었다. 생명사상의 원조가 바로 이 마을에서 나왔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사람은 놀아서는 안 된다. 일을 해야 한다. 그냥 밥만 먹고 논다면 한울님이 노하신다'며 짚신을 삼거나 나무 한 그루 심는 작은 정성이 곧 우주를 모시는 것과 같다 하시던 해월 최시형 선생님이었다.

'사람 섬기기를 하늘같이 하라'고 했으며 '여성들도 글을 배우고 공부를 해야 한다'며 가르침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동학의 2대 교주로 방방 골골을 다니며 평등함과 평화의 사상을 전파하신 것으로도 유명하다. 동학이 탄압을 받으며 38년간 피신생활을 하던 중 1898년 고산마을에서 체포되어 처형됐다.

이렇게 훌륭한 해월 최보따리 선생님의 역사적 자취를 내가 사는 지역에서 만날 수 있다는 것이 신기했고 뿌듯한 마음까지 들었다. 이런 역사를 마음속으로 느끼면서 좀 전에 보았던 마을 표지석을 다시 보았다. 왜 하필이면 해월 최보따리 선생님을 기리는 기념비 바로 옆에 그렇게도 위압적인 마을 표지석을 붙여 세웠는지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마을 표지석은 마을을 안내하는 공동체의 중요한 자산이다. 최근들어 전국의 많은 마을들이 마을안에 담겨진 소중한 역사를 새롭게 이야기로 꾸미는 마을의 스토리텔링이 많이 만들어지고 있다. 마찬가지로 고산마을을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고산리의 친환경 농산물과 전원풍경을 제공하는 것 이상으로 역사의 이야기를 제공하는 것이 더 소중할 수 있다.

해월 최보따리 선생님의 생명과 평화의 역사를 되새길 수 있는 정신적 여유를 제공하는 마을이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해 본다. 우리 원주 생명사상의 큰 스승이신 무위당 장일순 선생님의 글씨로 새겨진 해월 최보따리 선생님을 기리는 비석이 왜소하게 보이지 않도록 마을 표지석 위치를 조금만 옮겨준다면 미래의 고산마을은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 더 큰 생산물을 만들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최초의 천주교 공동체 영산공소, 해월 최보따리 선생님 기념비 등의 작은 역사들이 모여서 고산마을의 가치는 더 높아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