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민정부 시절인 1995년 해방 50주년을 맞아 논란이 많았던 옛 조선 총독부 건물을 철거하던 모습이 아직도 내 기억엔 생생하다. 올바른 민족정기 회복을 위해서였다.

우리가 살고 있는 원주시 봉산동 봉산 기슭에는 1907년 8월 5일 일제의 대한제국 군대 해산에 반발하여 강원도, 충청도, 경기도 일대에서 7개월 간 100여 회가 넘는 전투를 치열하게 전개하면서 일제의 간담을 서늘케 했던 민긍호 의병장의 무덤이 있다.

헌데 그 앞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흉물스런 모습으로 만주에서 독립군을 때려잡던 친일파 정일권이 세운 기념탑이 뾰족하니 서있다. 정일권이 누구인가? 일제의 괴뢰국인 만주국에 설치되었던 만주군관학교 출신으로 1940년대 초반에 간도헌병대장으로 부임하여 사실상 관동군의 예하부대로서 항일 세력의 토벌에 종사하고 있었던 친일파 인물이다. 아이러니도 이런 아이러니가 없다.

그가 해방 이후에 화려한 군 경력과 관직 생활을 했다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우리 민족이 일제에 의해 가장 고통받던 시절 그가 가장 처절하게 일제와 싸우던 독립군을 일제와 함께 때려잡았다는 것이다. 이것이 의병대장 민긍호 라는 이름과 독립군을 때려잡던 친일파 정일권 이라는 이름이 한 공간에 공존해서는 안 되는 역사적 이유다.

1년에 몇 번씩 학생과 시민 그리고 지인들과 그곳에 갈 때마다 저놈의 뾰족한 시멘트 첨탑만 보면 울화통이 치민다. 아니 부끄러운 마음이 먼저일 것이다. 지하에 계신 민긍호 의병장의 마음이 어떠할까? 국내에서 누구보다도 치열하게 일제와 전투를 하다 횡성 강림면 월현리에서 애통하게 순국하신 분 묘 앞에 친일파가 세운 기념탑이라니… 대한민국 반쪽 땅에 어디 이런 일이 한 두 가지이겠냐만은 역사를 교훈 삼아 오늘을 사는 우리의 현 역사 의식 수준을 보여주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를 비운에 떠나보낸 부인과 어린 아들, 딸은 일제의 감시를 피해 만주와 연해주를 넘나들며 고난의 세월을 보내야만 했다. 그것도 모자라 1930년대에는 옛 소련의 한인 강제 이주 정책에 의해 연해주에서 중앙아시아에 정착하게 되었고 현재는 그 후손들이 카자흐스탄에서 고국을 그리며 살아가고 있다.

그 가족들을 위해서라도 일제하 민족을 배반하고 일신의 영달을 위해 살아오다 또다시 자신들의 왜곡된 삶의 방패막이로 둔갑해 서있는 저 흉물스런 시멘트 탑은 철거되어야한다. 더 나아가 올바른 민족정기를 세우기 위해서는, 원주에서 가장 먼저 군인들이 정의의 횃불을 올렸던 자랑스러운 지역임을 생각할 때는 당장 철거해야 마땅하다. 그리고 그 자리에 진정으로 그분을 위로하고 감사하는 우리 원주 시민의 애뜻한 마음이 담긴 작은 탑비를 세워야만 한다.

역사는 과거와 현재와의 대화라고 영국의 역사학자 토인비는 말했다. 어떤 마음과 자세를 가지고 그분과 대화를 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일단 대화를 위한 전제 조건은 철거다. 또한 최초로 봉기한 지역 원주시와 최후로 순국한 지역 횡성군에서는 합동으로 민긍호 의병장 선양 행사를 다양한 방법으로 추진해 우리의 미래인 자라나는 청소년들이 올바른 역사관을 정립하는데 일조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조만간 흉물스런 시멘트탑이 쓰러지는 모습을 눈물겹게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