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 단체에서 진행하는 교육프로그램에서 철인 3종 경기에 지체장애인 아들을 데리고 참여하며 아버지와 아들이 펼쳐가는 감동적인 휴먼 다큐를 보았다. 아버지의 상과 역할이 그렇게 위대할 수 있다는 사실은 나에게 큰 충격이었다.

우리사회의 정서에 비추어 선친에 대한 평가와 언급은 고통스러운 일이다. 고백할 만한 일인지 모르지만 나의 아버지는 친일인사이다. 그것도 악명 높은 고등계 형사 출신이다. 나는 성장 과정에서 민족의 독립운동에 대한 위인들의 희생과 고난사를 접할 때마다 자괴감과 공허함이 교차함을 지울 수 없었다. 성장기에 겪었던 묘한 정체성의 혼돈에 노출된 나의 경험들은 우리사회가 겪는 정체성 논란만큼 심각했다.

나의 아버지는 언제나 고개를 숙이고 다니셨다. 아버지에게 동네 어르신이 술자리에서 물었다. 자네는 왜 평생 고개를 숙이고 다니느냐고. 아버지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역사의 죄인이다"라는 대답으로 일관하셨다. 반민특위의 법정에서 나의 아버지는 자신을 변호하는 기회에 가족만 남기고 방청객들을 내보낸 뒤 판사를 향해 '나에게 반민행위를 지시했던 당신들이 어떻게 그 자리에서 나를 심판하는가'라고 절규했었다던 이야기는 나중 큰아버지한테서 들은 이야기이다. 사형선고를 받은 아버지는 복역 후 반민특위의 해산과 더불어 출소하게 되었다. 이후 담당 판사는 월북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대학을 다니다가 그만두게 된 나는 1973년 한때 고향에 머무르는 신세였다. 그해 봄 나는 아버지께 인사도 없이 뺑소니로 청량리 행 열차에 올랐다. 차창너머 먼발치 역전주막거리에서 아침부터 술을 찾으시는 아버지의 초췌한 뒷모습이 살아생전 마지막이 되었다. 일제 군국주의 교육관이 몸에 밴 데다, 심리적 정신적으로 피폐해진 아버지는 자식들에게 억압적이었다. 청개구리처럼 역행과 퇴행을 일삼는 나의 성장기는 일종의 나사풀기의 과정이었다. 소리내어 밥먹기, 옷차림은 허접하게, 동네 바보들하고만 놀기 등….

외세의 기득권력을 안이하게 선택함으로서 잔인한 역사의 칼 날 위에서 허우적이며 일생을 마감한 아버지의 모습은 나에게 '유장한 역사의 강에서 모든 가해자는 피해자다'라는 사실을 일깨워주었다.

아무쪼록 나를 미술의 길로 인도한 결정적인 힘은 아버지의 가르침이다. 나의 일생과 작품을 관류하는 가치는 "진실"이다. 왜 아버지는 '진실성'에 목말라했는지 그 이유는 알 길이 없다. 하지만 그 말씀은 어린 나의 머릿속에 각인되기 충분 했다. 비정한 전장터에서 주인공 '가지'에게 주어지는 삶의 점철…'고미카와 준페이'의 '인간의 조건'을 애독하시는 모습 등등 손에 잡히는 감은 있으나 확실하지 않다.

나는 순진했던 청년시절 한 때 언론사에 근무해봤지만 이 땅에서 '진실'운운하는 것은 가당치 않는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우리 사회에서 혼을 바쳐 '진실'을 추구하는 일은 화가의 길 밖에 가능하지 않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미술은 내 생의 버팀목이자 돌파구이다.

고난의 땅에 태어나 오욕적 생의 수렁에서 건져 올린 '진실'이라는 가치를 선사한 아버지와 그리고 새로운 선택을 시작하는 아들 세대, 3대를 잇는 나는 도대체 어떤 역할의 다리가 되어야 하는가? 깊어가는 가을 밤 작업실에서 나에게 주어진 남아있는 아버지 역할에 대해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