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리 선생은 내가 춘천 사범학교를 졸업하던 해인 1957년 '불신시대'라는 작품으로 현대문학신인상을 수상하며 문단에 나오셨다. 1962년에는 '김약국의 딸들'이 을류문화출판사에서 발간되자 매진됐다.  

1966년 내가 한창 문학공부에 심취 해 있을 때, 신구문화사에서 '현대문학전집' 17권이 출판됐다. 그때 권당 480원 하는 17권을 다 사서 읽는데, 11권에 박경리, 이문희, 정인영의 소설이 실려 있었다. 나도 소설을 쓸 욕심으로 편집자가 책머리에 쓴 아래 글을 읽고 박경리 선생에게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중략) '김 약국의 딸들'이나 '시장과 전장' 같은 장편에 이르러 작가의 관심의 폭은 현저하게 넓어져 있다. 개인적인 불행을 집요하게 기록한 초기의 세계에서 한 가족의 그것으로 사회적인 그것으로 주목 할 만 한 변모를 거듭 한다. 이런 발전적 변모는 한국작가에게 극히 드문 일에 속한다.

춘천 효제초등학교 옆 월세방에서 낮에는 6학년을 가르치고 밤에는 문학서적을 읽으며 글을 썼다. 당시 읽은 책이 '영주(玲珠)와 고양이' '반딧불(신태양 10월호)' 같은 단편이었다. 여류 소설가 중 한무숙('대지'의 작가 미국의 펄 벅 여사가 내한 했을 때 대담을 나눈 인물이다) 씨와 박경리 선생을 특히 좋아한 시절이기도 했다. 이후 본격적인 동화문학에 빠져 한국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연못 속의 동네'를 발표하고 '김소위와 노루'로 현대아동문학상을 받았다. 춘천에서 강원아동문학회를 창립한 것도 이무렵이다.

내가 원주초등학교에 부임한 것이 1980년 3월이니 선생과 같은 해에 원주로 이사한 셈이다. 한국문학의 거성이 30년간 사시던 서울을 떠나 원주로 온 것을 궁금하게 여기는 사람들도 있다. 80년대 전두환 정권 당시, 선생은 사위 김지하 시인이 필화사건으로 구속 수감되자 어려운 처지에 있는 딸(김영주 현 토지문화관장)과 어린 외손자를 돌봐주시려 원주로 이사 하신 것이다.   

1980년 늦가을로 기억된다. 지금은 고인이 된 박일송(원주문협 초대 회장) 선생이 단구동 박경리 선생 집에 가자는 것이다. 당시 문단에 데뷔한 회원은 나와 원수연 시인 둘 뿐이었다. 셋이서 지금의 박경리문학공원 대문 앞에 왔지만 선생을 뵙지 못하고 돌아선 일이 있다. 당시 박일송 선생은 박경리 선생보다 문단 선배였지만 교분이 없었던지 그 뒤로 끝내 뵙지 못하고 원주를 떠나셨다.

돌이켜보면 어려운 여건 속에서 토지를 집필 하면서 외부와의 단절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선생께서는 아픈 세월을 견디시고 1994년 8월 토지를 탈고 하신 뒤에야 연세대학 원주캠퍼스에 강의도 나가시면서 차차 문인들과도 교류하게 되었다.

단구동 옛집 주변이 개발되자 매지리 회촌마을로 거처를 옮기고 그 곳에 토지문화관과 문화예술인들을 위한 창작실을 건립하셨다. 국내외 문인들에게 창작여건을 만들어주신 한국문학의 어머니 같은 애정을 베푸신 것이다. 토지문화관에서는 유명문인들의 특강도 열렸다. 나도 '원주문학의 뿌리와 성장'이란 제목으로 강의한 일이 있다. 그 때 선생의 딸 김영주 관장을 처음 대했고, 2002년에는 KBS 원주방송국 '목요생생토론'이란 대담프로그램에서 원주의 문화적 자산인 박경리 선생에 대해 상지대 임상오 교수와 대담을 나눈일이 있다.

그 뒤 토지문화관에서 연락이 왔다. 선생께서 저녁을 사고 싶다는 것이었다. 원주시 문화관광과 직원 몇 분과 고창영 토지문학공원(현 박경리문학공원) 소장, 원주문협 김성수 시인, 권순형 시의원 등과 함께 공원 옆 한식집에서 선생을 뵙는 기회가 주어졌다.

처음 뵙지만 오래된 듯 반백의 노 여류 소설가 앞에 나는 순진한 소년으로 돌아갔다. 그 때 작고 한지 오래된 춘천교육대학 초대 학장이며 아동문학가 최태호 선생과 시인 박목월, 윤석중 선생의 일화를 들으시고 "아! 그 키다리 아동문학가"라며 사뭇 옛날에 젖으시던 모습이 생생하다. 이런 말씀도 하셨다. "원주문인들이 나를 야속하게 생각 했지요. 만나주지 않아서. 그때 내가 외부와 문인들과 접촉이 있었다면 토지를 쓰지 못했어요. 외부와의 단절은 나를 고독한 자유공간, 창작의 세계에 가두어 놓을 수 있는 최선책이었지요." 연신 담배를 피우시는 모습에 토지를 창작하던 그 고통이 노안의 안경테를 넘어 내 마음속으로 전율 돼 왔다.

돌아가시기 전해 10월에는 토지문화관 뒷산 기슭에서 산신제를 올리신다고 몇 분만 오라 하셨다. 연세대 교수, 창작실에 와 있는 국내외 작가, 원주시 간부공무원, 나와 원주문인 2명이 제대 앞에 섰다.

대자연의 신비와 위엄 앞에 감사와 겸손을 보이시는 큰절을 올리셨다. 자연이 인간에게 준 선물인 토지, 땅, 흙이 생명을 키우는 어머니라는 겸허함에 뒤 따라 모두 산을 향해 절을 했다. 절을 엎드려 해 보지 못한 러시아 작가는 몇 번을 연습 하고야 절을 했다. 

장장 26년에 걸쳐 토지 속에 한국여인의 한을 서리서리 풀어놓고, 민족의 가슴에 항일 정신을 심은 한국문학의 거성. 현대문학의 어머니이신 박경리 선생은 하늘나라에서도 필요했던지 2008년 5월 5일 영원히 잠드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