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정면 동화역 뒷편으로 개울을 건너 산기슭을 넘으면 나타나는 한산이씨 의정공파 집성촌(자갑동마을).

 지정면 간현리가 한산이씨 송와공파 집성촌이라면 지정면 가곡리와 보통리 자갑동마을은 한산이씨 의정공파 집성촌이다. 지금 현재 살고 있는 가구 수는 가곡리가 훨씬 많지만 보통리 자갑동 마을은 '이지난' 입향조가 처음부터 들어와 터를 잡고 살았던 본향이다.

천혜의 은신처 자갑동

	▲ 마을 주변 산에서 볼 수 있는 묘지 대부분은 입향조를 포함한 선조들의 산소다.

자갑동은 '작압부리'라 불렸는데, 작압이란 '잘 보이지 않는 곳'이라고 한다. 이를 한글로 옮기는 과정에서 '자갑'이 되었다는 설이 있다. 또 한산이씨가 갑자년부터 살기 시작한데서 자갑동이 되었다는 설도 있다.

자갑동을 찾아가는 길. 동화역 뒤 개울 건너 산기슭을 넘자 수백 마리 소들이 먼저 반긴다. 열 두어 집이 옹기종기 모여 있지만 제법 고급스런 주택들이다. 예전에는 대부분이 이씨였지만 지금은 삼분의 일 정도만이 일가라고 한다. 산을 깎아 길을 내고, 개울에 다리를 놓지 않았다면 영락없는 고립무원지대임이 틀림없겠다. 뒤는 병풍처럼 산이 막혀 있고, 앞은 조금 트인 곳이기 때문에 안에서 밖은 잘 보이지만 밖에서 안은 잘 보이지 않는다. 지형상 많은 사람들이 살 수 있는 곳이 아니다. 6·25 때 집이 한 채도 파괴되지 않은, 드물게 운이 좋은 동네였다는 말이 실감난다.

이런 천혜의 은신처에 어떻게 들어와 살게 되었을까? 조선 인조 때 '이괄의 난'과 관계가 깊다. 입향조인 '이지난'이 바로 이괄의 장인인 까닭이다. 사위가 난을 일으키는 바람에 졸지에 쫓기는 신세가 돼버린 일행이 강릉으로 피신하기 위해 이곳을 지나가던 길이었다. 그런데 관군이 바짝 뒤를 쫓아와 곧 잡힐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이때 근처에 있는 바위 뒤에 배를 숨기고 일행은 자갑동으로 숨어든 것이다.

"산속 깊숙히 숨어있으니까 뒤따라오던 관군들이 이들 일행을 찾지 못한 거예요. 아무리 찾으려 해도 못 찾으니까 그냥 돌아가고 말았지 뭐." 이수원(68) 종중회장의 말이다.

"무사히 화를 면한 사람들이 더 이상 다른 곳으로 피신할 필요가 없어졌지요. 그래서 이곳에 눌러 살게 되었는데, 그 아드님은 강릉으로 피신했다고 해요. 그때 배를 숨겼던 바위를 '은주암'이라 부르지요. '은조암'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입향조 할아버지의 부인 성씨가 횡성조씨였거든요. 그래서 '은둔하다'는 뜻의 '은'자와 성씨인 '조'씨를 붙여서 '은조암'이라 했지요."
　
"나는 가문을 지키는 수문장이다"

	▲ 한산 이씨 의정공파 12대 종손 이수원 원주원예농협조합장.

의정공파 12대 종손인 원주원예농협 이수원(68)조합장은 종중 일 또한 게을리 하지 않는다. 자갑동에서 태어난 그는 자갑동에 뼈를 묻을 생각이다. "1975년 집을 개축했어요. 전에 살던 집은 한옥이라 관리가 너무 어려워서 다 뜯어내고 대대적인 공사를 벌였지요. 이 집터가 정말 명당 중의 명당이예요. 입향조 할아버지 때부터 대대로 이 터에서 살았으니까요."

이 조합장은 한 번도 고향을 떠나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단다. 대학 교수로 재직한 아버지 때문에 어렸을 때 수원에서 잠깐 살았던 적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평화롭고 여유로운 이 집 만큼 좋은 곳을 아직까지 본 적이 없다고 한다. 마을 입구에서 키우는 수백 마리의 소 때문에 여름엔 오물냄새와 파리·모기떼로 고충이 심할 것도 같은데 신경 쓰지 않고 산단다. 조상과 고향을 지키는 수문장의 남다른 애정이다.

"우리 며느리가 참 대견해요. 종손 집 살림이라 할 일이 산더미처럼 많은데도 싫은 소리 한번 안하고 손자 셋 키우며 이곳에서 살아요." 젊은 사람이 종부로 산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줄였다고는 하나 집안 제사가 명절 빼고 여덟 번이나 된다. 종손 댁이라고 찾아오는 사람은 또 얼마나 많은가. 봄이면 철쭉축제를 벌여도 좋을 만큼 아름다운 경치를 보러오고, 여름이면 피서차 들리고, 가을과 겨울엔 명절이 끼어 쉴 틈이 없는 며느리다. 이 조합장은 아내에게도 미안하지만 며느리에게 더 미안해서 많았던 종손 집일을 줄였다고 한다.

집에서 100m 정도의 거리에 있는 사당 관리도 이 조합장이 직접 한다. 15년 전에 지었는데 아름다운 멋보다는 실용성 위주로 지었다. 중후하면서도 단호함이 풍기는 선비의 자태다. 이 사당에서는 일 년에 한번 시월 초하루에 시제를 지낸다. "이때는 간현리 송와공파 종중들도 시제를 지내러 옵니다. 송와공파가 의정공파의 동생이거든요. 이창복 전 국회의원이 종중회장인데 참 잘하고 있어요." 온 동네가 시끌시끌한 제사를 지내고 나면 식사는 원주시내의 식당에서 해결한다. 

	▲ 종손인 이수원 조합장 자택 인근에 세워져 있는 사당.

고민교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