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그 때의  명절은 풍요로웠고 무척이나 기다렸으며…그런데 언젠가부터 족보도 없는 명절(?)이 생겨나더니

우리 민족에게는 예부터 전해 내려오는 아름다운 명절이 있다. 그 나름의 특이한 의미를 가진, 내가 어렸을 때는 무척이나 기다렸었던 날이었다. 특히 내가 어릴 때,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못했던 설날과 추석에 얽힌 추억은 아직도 기억에 많이 남아 있다.

어머니가 만들어주신 콩나물 잡채를 너무 먹고 체하여 설 명절 며칠 동안 아무 것도 먹지 못했던 억울한 일, 연중행사로 명절 전날만 되면 목욕탕의 배수구가 막힐 정도로 인산인해를 이루는 때를 밀던 일, 제법 성장해서는 세배 드리러 이 집, 저 집 다니다 어른들께서 한잔씩 내려주신 술잔을 받아먹다 완전히 맛이 갔던 일, 송편을 만들었는데 내 송편이 그럴 듯하자 동네 어른들이 "기환이가 송편 만드는 것을 보니 나중에 예쁜 색시에게 장가들겠구먼!" 하시는 말씀을 듣고 쑥스러웠던 일(속으론 좋았지만) 등….

아무튼 그 때의 명절은 왠지 모르게 풍요로웠고 무척이나 기다려 졌으며 정말 즐거웠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족보도 없는 명절(?)이 학생들 사이에서 소리 없이 생겨나더니 급기야는 사회의 풍속도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이를테면 발렌타인데이, 화이트데이, 블랙데이, 빼빼로데이, 로즈데이, 옐로우데이, 레드데이, 실버데이, 그린데이….

이렇게 족보도 없는 많은 명절(?) 중에서 단연 압권인 것은 초콜렛과 사탕장수들이    1년 매출액의 50%를 팔아먹는다는 2월 14일 발렌타인데이와 3월 14일인 화이트데이를 들 수 있다. 원래 발렌타인데이는 3세기경 로마제국에서 서로 사랑하는 젊은이들을 황제의 허락 없이 결혼시켜준 죄로 순교한 발렌타인이라는 사람의 순교일이다. 그러니까 현재 벌어지는 풍속도는 완전히 조작된 것으로 결국 업자들이 만든 수준 높은 농간의 결과물(?)인 것이다.

어쨌든 발렌타인데이가 여자가 남자에게 초콜릿으로 사랑을 고백하는 날이라면 화이트데이는 남자가 여자에게 사탕으로 사랑을 고백하는 날이다. 남자가 여자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것이 특별한 건 아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사랑을 고백한 여자의 마음을 남자가 받아들일 것인지를 결정하는 의미로 해석된다. 물론 연인 사이인 경우에는 발렌타인데이 때 받은 선물에 답례하는 날이다.

나도 언젠가 쑥스런 표정으로 아내에게 사탕을 선물한 경험이 있는데, 문제는 어린 학생들이 너무나 무분별하게 이 이상한 명절(?)에 들뜬 마음으로 임한다는 것과 그 선물의 가격도 만만치 않은 수준에 이른다는 것이며, 본질을 떠나 너무나 사치스런 분위기까지 연출한다는 점이다. 여학교에 근무할 때, 매년 이 때만 되면 나도 제법 학생들에게 초콜릿을 받는 형편이었지만 받으면서도 마음은 그다지 흐뭇하지 않았다.

장삿속이든 어떻든 이미 하나의 문화로 자리를 잡아버린 이 족보 없는 명절에 대해 나는 어떻게 처신을 하여야 하나…. 그것에 편승하여 아이들의 문화를 이해해주는 척 해야 하나 아니면 꽉 막힌 선생님이라고 아이들이 생각하더라도 수용하지 말아야 하나….

내가 이래라 저래라 말하기 이전에 벌써 공룡처럼 커다랗게 자리 잡아버린 이 족보 없는 명절에 대하여 나는 어떻게 아이들을 교육시켜야하나…. 올해도 이런 갈등 속에 족보없는 명절을 대하게 된다. 이 궁리 저 궁리 끝에 하는 말, "얘들아! 뭔가를 거창하게 선물하는 것도 참 중요하고 의미 있는 일이지만 그보다 더욱 소중한 것은 상대에 대한 마음가짐이란다. 비록 내가 선물하는 것이 작고 보잘 것 없는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에 사랑하는, 존경하는 마음을 가득 담는다면 이처럼 귀중하고 값진 것이 또 어디에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