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성인물의 일과 직업…'이 주제여서일까? 이날 강의에는 유독 주부 수강생이 많았다.

가문의식에 대한 유교적 습속 여성 삶과 직업에 영향
소설 '토지' 여성들의 삶과 노동 체험 역동적으로 그려

　'토지'에는 한국 근대사의 질곡을 헤쳐나간 여성들의 삶의 모습이 다양하게 서술돼 있습니다. 격변기였던 시대배경만큼 '토지'에 등장하는 여성 인물들의 삶도 역동적이고 다층적입니다. 계층과 계급이 다른 여성들의 삶을 통해 다양한 삶의 인식과 지평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이들은 때로는 봉건적 의식을, 때로는 진보적인 인식을 드러냅니다. 본 강의에서는 당대 여성의 구체적 삶 속에서 여성의 일과 직업이 어떻게 형상화되고 있으며, 일과 직업이 그들의 삶에 어떤 변화를 가져오는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흔히 여성의 일은 크게 가사노동과 임금노동으로 구분됩니다. 자본주의 이전 사회에서 여성의 일은 가족을 위한 재생산 활동인 가사노동과 생계 유지형 무급노동인 가내노동에 한정됐습니다. 자본주의가 성장하면서 저임금 노동력의 필요에 따라 임금 노동에 참여하는 직업여성도 출현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임금노동과 비임금 노동의 구분은 가사노동과 무급노동을 비생산적인 노동으로 취급하게 만들었습니다. 가사노동과 무급노동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노동임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교환가치로 환산되지 못하는 시스템이 형성됨으로써 여성의 가사노동과 가내 무급노동은 공식적으로 압류당해 왔습니다. 또한 임금노동현장에서조차 여성의 노동 가치는 남성 노동자에 비해 차별적 임금을 감당해야 합니다.이러한 여성 노동에 관한 일반론은 '토지'에서 여성 인물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①익명의 농촌노동(1894굜1908ㆍ윤씨부인과 함안댁, 하인들, 평사리 농민 아낙들)
　'토지' 1부에서 조선 후기 양반여성인 윤씨부인의 경영 능력과 감정노동, 양반과 혼인한 중인출신 여성인 함안댁의 부도의식 등은 유교적 가부장제가 여성의 삶을 어떻게 굴절시켰는지 보여줍니다. 
　평사리 시대 여성들은 모든 익명노동의 담당자들이었습니다. 양반 여성과 노비, 농촌 여성의 노동은 가사노동을 비롯해 농촌의 보조 일꾼으로서 농촌 노동자의 주변부 역할에 한정돼 있었습니다. 예외적인 경우로 주막을 운영한다든지, 시장상인의 형태가 있었지만, '토지'의 평사리 시대는 조선 말 농촌 사회의 전형적인 시대로 여성들의 노동에는 이름이 붙지 못하던 시기였습니다. 작가는 '토지'에서 농촌 아낙들의 노동요와 이야기 등을 통해서 일상의 익명노동을 집단놀이와 결합된 커뮤니케이션 공간으로 승화시키고 있습니다. 여성 노동의 관점에서 보자면, 이 시기의 경우는 근대 이전의 경험들이 녹아 있는 시기입니다.
　②자본의 등장과 축적(1910굜1920ㆍ공월선, 최서희, 기화, 공송애, 임이네 등)
　자본노동시대는 간도라는 공간에서 자본주의와 근대를 받아들이는 시기입니다. 자본의 물결이 밀려들어오는 간도에서 서희의 자본 축적과 임이네의 욕망에 완전히 포섭돼 인간성마저 상실해 버린 모습은 기형적인 근대화의 체험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서희는 비록 자본과 지략으로 평사리를 되찾게 되지만, 우리 민족은 자본과 지략으로 일제의 폭압에서 벗어날 수 있는 행운은 갖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서희의 축재와 평사리 되찾기는 민족적 염원의 은유라기보다는 근대의 삼투에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자본은 축적하지만, 정체성을 온전히 가질 수 없는 우리 근대의 얼굴입니다. 또한 서희가 경영일선에 직접 나서지도 않습니다. 서희의 경영 전략은 길상의 성실성과 능력으로 외화되어 길서상회의 정체성을 구성하게 됩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 시기도 익명노동시대와 마찬가지로 여성의 노동은 소외된 노동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여성들의 직업에 있어서도 새로이 등장한 카페 여급 등의 직업이 근대의 옹색한 치부를 보여줄 뿐입니다.
　③교육 노동과 직업 정체성의 발현(1923굜1945ㆍ강선혜, 임명희, 유인실, 길여옥 등)
　3부 이후 신여성들의 직업 분포도는 변화하는 시대의 흐름과도 일치합니다. 다양한 인물들의 스펙트럼 속에서 전통적인 모습과 근대적인 모습, 혹은 직업을 통해 일본 제국주의에 저항하거나 동화하는 모습들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고등교육을 받은 신여성들이 선구자로서 많은 업적을 성취하지는 못했습니다.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제약 때문이기도 했지만 스스로 전통사회의 굴레를 벗어버릴 수 없었으며, 일제시대 여성들은 성의 차별과 더불어 민족적 차별이라는 이중의 굴레에 얽매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서희가 진주로 옮겨온 이후는 여성들의 직업이 다양합니다. 교사, 간호사 등 임금 노동을 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고 유치원 경영, 전도사 등의 근대 교육 수혜자들의 자아 정체성 발현형의 직업에서 기생, 카페 여급 등의  생계형 직업에 이르기까지 다양합니다. 또 그 안에서 자기 직업 정체성에 대한 의식이 발현하는 시기로 볼 수 있습니다.
　특히 이 시기는 신여성과 직업여성이라는 개념이 등장한 때이며, 신여성과 직업여성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이 다양한 양태로 나타나 있습니다. 신여성들인 강선혜, 임명희 등의 신여성에 대한 언급에서부터 정상조와 임명빈의 신여성에 대한 비판, 조준구가 이화학당을 다니다만 신여성을 만난다는 이야기 등이 직접적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소설에서 언급되는 신여성론은 비판적이고 부정적인데 반해, 주요 등장 인물들인 임명희, 강선혜, 유인실, 길여옥 등의 직업의식과 삶의 결단 등을 비춰보면 신여성들이 긍정적으로 그려집니다. 교육받은 몇몇 여성들의 삶의 모습에 한정되기는 하지만, 신여성들의 주체적 삶의 모습과 고뇌가 그려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시기는 여성들이 근대를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직업노동을 통해서 이름과 자아정체성을 찾는 시기입니다.
　현대 사회에 와서는 보다 구조화되고 공식적인 방식으로 여성들의 노동이 평가절하되고 있고, 직업 현장에서 출산과 육아는 아킬레스건이 되어 여성들 스스로 노동 현장을 기피하게 만들었습니다. 이와 더불어 우리나라 여성들은 가정과 일터에서 유교적 가부장제라는 굴레도 동시에 헤쳐 와야 했습니다. 유교적 가문중심주의는 조선시대 여성에게는 삶의 지침이자 존재의 이유가 되었고 식민지 하에서도 혈통이나 가문의식에 대한 유교적 습속이 여성들의 삶과 일, 직업에 적잖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이렇게 제약과 편견으로 가득한 여성들의 삶과 노동 체험이 박경리의 소설 '토지'에서는 여성들의 독자적인 창조력과 함께 역동적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토지'는 서희뿐 아니라 많은 여성 인물들이 근대의 변화를 다양하게 인식하고 주체적으로 실천하는 여성들의 주체적인 역사 만들기의 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