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나라도 놓칠 새라 열심히 듣고 열심히 옮겨적고…토지학교의 열기는 고3교실을 능가한다.

　1. 작가와 독자의 만남
　이른바 베스트셀러 작가나 유명 작가의 작품이 출판되면 대형서점에서는 서둘러    '작가와의 만남'을 기획한다. 유명 연예인의 팬 사인회 규모는 아니어도 이러한 기획은 분명 작품과 작가를 홍보하는 중요한 마케팅 수단이다. 물론 일반 독자들에게도 밑질 게 없는 이벤트다. 활자 뒤에 숨어 있는 내가 좋아하는 작가와의 만남이라니, 그것도 오프라인에서. 물론 만남 이후 환상이 깨질 수도, 아님 오히려 증폭될 수도 있는 노릇이지만, 중요한 것은 그 이후가 아니라 만남 그 자체이다.
　작가와의 만남은 일반 독자 뿐 아니라 평론가나 문학연구자에게도 가슴 설레는 일이다. 지금 만약 이광수를 만날 수 있다면  '과거사 진상 규명'의 차원이 아니어도 참으로 묻고 싶은 것이 많다. 춘원과 시종 각을 세웠던 일생의 라이벌 김동인은 어떠한가. 멀리 갈 것도 없이 나의 대학 시절, 유행과 무관한 굵은 뿔테 안경과 쉰 목소리만으로도 울림을 주었던 김남주 시인과, 21세기로 들어서던 그해 서울의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배경으로 생을 마감한 서정주 시인…. 아, 지금 그들을 다시 만날 수 있다면…. 
　얼마 전 한국문화예술위원회(위원장 김병익)가 회원들을 대상으로 한 앙케이트에서 가장 좋아하는 소설로 '토지'가 선정됐다. '토지'가 세상에 나온 지 올해로 38년째이니 '고전(?)'에 해당하는 작품이 여전히 많은 독자들에게 사랑받고 있는 것이다.
　내가 읽은 작품의, 혹은 내가 좋아하는 작품의 작가를 가까운 거리에 두고 만날 수 있다는 것은 축복이다. 언젠가 그와 함께 내가 읽은 그의 작품에 대해서, 혹은 그의 삶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는 행운이 주어진다면, 꿈만 같은 일이다. 혹 그런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 해도, 우리 곁에 중심을 잡아주는 작가는 그 존재만으로도 힘이 된다.  
　혁신도시로, 산학협력으로, 평창 동계올림픽의 이웃으로 '원주'가 뜨고 있다. 하지만 원주의 가장 큰 자랑거리는 '토지'의 작가 박경리 선생이다. 시장님의 이름은 몰라도 박경리 선생과 '토지'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오스트리아의 짤츠부르크는 모짜르트의 고향이란 이유 하나만으로 '모짜르트 쿠겔른 초콜렛'을 비롯해 모짜르트 이름을 딴 관광 상품으로 먹고 산다. '토지 문학 공원'과 '토지'를 완결했던 집필실과 토지 문화관은 원주의 큰 자산이자 원주 시민의 자랑거리이다. 문학도시, 문화도시 원주!     

　2. 토지와 역사소설
　'토지'가 지금은 우리나라 최고의 역사소설로 혹은 제일 좋아하는 소설로 손꼽히고 있지만, 1969년 '토지'가 처음 연재를 시작하고 작품이 완성되기 전에는 실패한 역사소설로 언급되기도 했다. 어떤 경우에는 함량미달을 이유로 '토지'는 아예 역사소설이 될 수 없다고까지 평가됐다.
　이러한 비판의 근저에는 '토지'가 뚜렷한 역사적 사건이나 인물을 그려내지 못하고 있다는 인식이 깔려 있다. 최근의 텔레비전 사극을 떠올려보더라도 과거의 역사란 이순신과 주몽과 연개소문의 것이지 이름 없는 민중의 것은 아니다.
　역사소설이란 역사와 소설의 만남을 전제로 한다. 상식적인 선에서, 역사란 과거의 사실을 말하며 소설이란 작가의 상상력으로 꾸며낸 서사문학이다. 사실과 허구의 만남이 곧 역사소설의 필요조건이 된다.
　하지만 그 둘의 만남은 생각처럼 간단히 정의되지 않는다. 과거의 수많은 역사적인 사건들과 영웅적인 인물들, 역사책에 굵은 활자로 강조되어 있는 왕과 신하들, 또한 과거 특정시기의 풍속과 문화들, 그것들을 떠받들고 역사의 격랑에 몸을 실었던 이름 없는 백성들 모두 역사의 구성물이다.
　이러한 전제를 바탕으로 우리는 역사소설을 '역사상의 사건이나 인물ㆍ풍속 등 사실을 소재로 하여 구성한 소설', 혹은 '실제의 역사적인 시대를 배경으로 삼아 특정의 실존 인물이나 역사적 사건을 재현 또는 재창조하는 소설'로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역사소설의 작가는 과거의 그 무수한 사건과 인물들, 풍속과 문화들 중 무엇을 취할 것인가.
　역사소설의 작가는 역사의 여러 구성물 중 하나를 선택한다. 그것이 곧 역사소설의 씨앗이 되며 뼈대가 된다. 과거의 역사를 처음부터 끝까지 온전히 복원하고 기록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할 뿐 아니라 의미 있는 작업이 될 수 없다. 중요한 것은 선택이다. 선택과 배제의 원칙이 적용된다는 점에서 사가(史家)와 역사소설의 작가가 딛고 있는 출발선은 같다.
　하지만 그 둘이 지향하는 바는 전혀 다른 것이 될 수밖에 없다. 사가(史家)의 목적이 과거 사실의 기록과 전수 굜 그것이 누구의 관점이든 간에 굜 에 있는 것이라면, 역사소설가는 단순히 과거를 기록하거나 기억하기 위해 소설을 창작하지 않는다.
　역사소설은 '역사로부터 빌려온 사실과 소설적 진실성을 지니는 '허구'를 접합하여 역사적 인간의 경험을 보편적 인간의 경험으로 전환하는 문학 양식'이다. 이러한 전환에 필요한 작가의 상상력이나 의도를 조절하는 주제는 역사적 사실을 변형, 수정, 가감하는 기준이 된다. 따라서 고정된 소재로서의 역사적 사실이 다양한 모습으로 재현되는 이면에는 늘 작가의 역사관이나 세계관이 매개변수로 존재한다.
　'토지'에는 역사책에 굵은 활자로 매겨진 역사적 사건과 인물들이 작품의 전면에 등장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 이면의 대다수 일반 민중들의 삶을 그리고 있다.
　당대의 객관적인 현실과 악화된 삶의 조건들 속에서 저항하고 타협하고 방관하는, 혹은 적응해 가기도 하고 좌절하기도 하는 여러 개인과 집단의 모습을 그려 보이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토지'의 소설적 특징이 역사상의 한 영웅적 인물이나 지도자적 인물 혹은 구체적인 어느 하나의 역사상의 사건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대개의 역사소설들과 '토지'가 갖는 차이점이며, '토지'가 역사소설인가 아닌가 하는 논란의 출발점이기도 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