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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의 가운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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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평
김명복
연세대학교 교수
가을 들판이 노랗게 물들었다. 아마도 지금 이 시기가 원주의 들판이 가장 아름다운 때일 것이다. 뭐니뭐니 해도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큰 즐거움은 우리가 노력하여 거두는 수확의 즐거움이다. 드문드문, 들판은 추수하여 볏단이 치워진 고랑도 있고, 추수하여 햇볕에 말리느냐 늘어놓은 볏단들 사이로 파놓은 물 고랑에 햇빛이 비껴 눈이 부셔 머리가 어지럽도록 현란하다. 지는 해가 아쉬워 붉게 물들인 구름들이 아름답고, 긴 장대 같은 구름사이를 비집고 나와, 수확한 벼 끄트머리를 살짝 건드리며 애무하는 몇 줄기 햇살의 간지러움이 몸을 떨게 한다.
어느 한곳 가을이 스며들지 않은 곳이 없다. 어두움이 깔리는 저녁은 저녁밥 짓느라 태우는 짚 냄새가 향기롭고, 방안 한가운데 들어선 낙엽 한 잎이 방 한가운데 턱하니 손님으로 나보다 먼저 들어와 앉아 어서 오라 한다.
갑자기 날씨가 차가워진 다음날 호숫가를 산보하였다. 그 어느 날보다 훨씬 많은 하루살이들과 잠자리들이 공중을 까맣게 수놓았다. 모두들 아차 싶어 겨울 준비들을 하느라 바깥으로 나와 부산하다. 아마도 뜨거운 여름은 아니더라도, 이렇게 빨리 추위가 다가올 줄은 몰랐다는 태도들이다.
오솔길을 틀어 따스한 양지로 나아가다가 길가에 누워있는 뱀을 보았다. 짙은 녹색으로 눈부시게 성장을 하고 10월 중순의 햇빛에 몸을 맡긴 채, 졸고 있는지 움직일 줄을 모른다. 저만치 쪼그리고 앉아서 나도 뱀과 함께 가을의 햇빛을 즐겼다. 나이 탓인가 이처럼 쪼그리고 앉아 있으면 금방 관절의 마디마디가 쑤셔온다. 걸으며 산을 오를 때에도 팔을 좌우로 힘껏 흔들며 오르지 않으면 피가 아래로 몰려 팔이 저려온다.
가끔 나는 홀로 자연 속에 있으면, 나를 둘러싼 모든 산과 들판이, 지나쳐 가며 흘낏 나를 쳐다보는 눈길이 관광객을 보는 듯하다. 이곳에서 무엇을 하는 군상인가 하고 산과 들이 의아해 하는 눈빛을 하고들 지나간다.
일전에 내가 친구에게 우리 인간은 잠시 이 땅에 머무는 나그네이고, 자연이 이 땅의 주인이라고 했더니, 그 친구가 그런 말 참 오랜만에 듣는다고 했다.
앞집 할머니가 아파트 앞 화단에 화초를 심고 계신 것을 보았다. 여름에도 그 자리에 똑같은 화초를 심고 계셨다. 할머니 말씀이, 집에서 잘 자라지 않아서 여름에 이곳에 화초를 옮겨 심었다가, 화초가 건강하여 다시 집으로 옮겨 심었더니 자꾸 화초가 시드는 것이 죄스러워 영구히 이곳에다 심기로 했다고 하셨다. 학교 신문에 학교에 가로수 은행나무 잎들이 여름부터 노랗게 물드는 것을 보고서도, 아무런 조치를 하지 않고 보고만 있기가 죄스럽다고 했다. 어디 화초나 은행나무뿐이겠는가?
우리의 주위를 살펴보면, 우리가 거두지 않아서 죽어 가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가? 자연뿐인가? 인간들은 어쩌고? 이 가을에 화초를 심는 할머니의 얼굴에 비껴 가는 가을 햇살이 왜 이렇게 따스하게 느껴지는 것일까? 이번 겨울은 유난히 추울 것 같다. 유류값이 올라서도 그렇고, 다시 구조조정의 한파가 몰려와 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잃고 추워할 것이다. 며칠 전 서울에서 강연회를 마치고 나오는 길에 마주친 한 회사원이 말하기를, 요즈음 회사에서 동료들이 하루의 용돈을 줄인다고 했다.
식사도 함께 하지 않고, 서로 눈치보며 따로따로 한다고 한다. 호주머니 사정이 궁핍하면, 인간 관계도 궁핍하여지기 마련인가 보다. 1980년대 미국에서 공부할 때 보니, 직장에 다니는 사람들 모두 퇴근 후에 직장의 일과는 상관없는 새로운 분야의 공부들을 하는 것을 보았다. 자신이 다니는 직장에 대하여 불안한 마음을 가지고, 언제나 다른 직장을 옮길 준비들을 하였다. 현재의 우리 나라 상황이 그때의 미국과 너무나 흡사하다. 가을의 자연은 신록의 여름을 어디에다가 옮겨 놓았는가?
그렇기는 하여도 가을은 겨울 준비로 풍성하다. 그러나, 우리의 금년 가을은 차가운 겨울이 오기도 전에 마음은 벌써 꽁꽁 언 겨울의 한가운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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