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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천히 그러나 꾸준하게 …
2002년 11월 14일 (목) 원주투데이 webmaster@wonjutoday.co.kr
조각가 박 광 필
평소에 존경하는 어른 한분이 모회사의 회장으로 취임하셨다.
한동안 뵙지 못한 터라 인사도 드릴 겸 새로 출근하시는 회사로 찾아 뵈었다. 회장으로 출근하시는 이 산업체는 그리 큰 회사는 아니지만 내실있게 경영하여 알차게 성장하는 회사로서 넓은 부지를 마련하여 새로운 사옥을 짓고 이전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고 하시면서 회사의 새로운 경영지표를 하나 지어 보라셨다.


남의 회사 모토(motto)가 될 경영지표를 함부로 짓는다는 것이 주제넘은 짓인지는 알지만 무작정 거절할 일도 못되어 며칠 동안 이런 저런 고민 끝에 “천천히 그러나 꾸준하게”라고 지어서는 조심스럽게 내놓았더니 흔쾌히 동의하셨다.


지나친 욕심에 과도한 목표를 세워 놓고 조급하게 서둘다가 어쩔 수 없이 편법을 동원하게 되고 요행수를 바라다가 결국은 파멸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경우가 허다하기에, 경영지표로 삼기에는 조금은 설명적이고 어쩌면 소극적으로 보일 수도 있는 이런 구절을 떠올려 보았는데 선뜻 동의하시며 쾌히 결정해 주시니 조금은 덜 쑥쓰러웠다.


조각작업을 하다 보면 가끔씩은 며칠만에 완성되기도 하지만 대부분 몇 개월이 걸리고 심지어는 1년을 넘기는 경우도 허다하다.
처음의 생각대로 일사천리로 진행되어 길지 않은 시간에 작업이 끝날 때의 성취감이나 만족감은 참으로 대단하다. 그러나 대부분은 처음 생각에서 모순이 발견되어 실재화되는데 문제점이 노출돼 생각을 바꾸거나 처음의 생각이 시간의 경과에 따라 업그레이드되므로 작업 방향이 변하게 마련이며, 이렇게 되다보면 작업은 미궁으로 빠지거나 혼돈에 빠져 오리무중이 되기 십상이고, 갈피를 잡지 못하여 중단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마땅한 해결책은 보이지 않고 한걸음도 앞으로 나갈 수 없는 이런 경우에 부닥치면 곤혹스럽기가 이만 저만 아니다.
간혹 성급한 마음에 어거지로 작업을 진행할라치면 십중팔구는 망치게 마련이고 그렇지 않다손 치더라도 결과는 졸작으로 남아 작품성이 시원찮은, 그냥 그런 물건으로 남게 마련이다.


이런 연유로 고민하고 빈둥거리며 생각의 실타래가 풀리길 기다리기도 하고 때로는 이 일에서 손을 떼고 아예 잊어버리고는 새로운 다른 작업을 시작하게 되는 것이다. 새로운 다른 작업도 별 수 없이 같은 상황에 빠지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며 이렇게 되면 훌쩍 여행을 떠나거나 또 다른 작업을 시작한다. 이렇게 동시에 여러가지 작업을 진행하면서 생각의 고리가 열리는 작품만을 계속하게 된다.


막히면 중단하고 열리면 다시 손대고 이렇게 반복하다 보면 한 작품이 시작에서 완성까지 몇 개월이 걸리는 것은 보통이고 1년씩 걸리기도 한다.
이런 모습이 주변에서 보면 영락없는 게으름뱅이요, 불성실하기 그지 없는 느림보로 보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이 빈둥거리며 어정대거나 하릴없이 쏘다니며 게을러질 수밖에 없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천천히 그러나 꾸준하게”만이 가장 빠른 해결책임을 알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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