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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양 나룻배와 허연집
2002년 05월 30일 (목) 원주투데이 webmaster@wonjutoday.co.kr
시인 오 탁 번
지구촌 각 나라가 대등하게 상대를 인정해야
청와대가 ‘푸른집’이면 백악관은 ‘허연집’


나의 시 「겨울 강」에는 <얼음 밑에 허리 숨긴 / 하양 나룻배한 척>이라는 말이 나온다. 여기에서 <하양 나룻배>는 물론 흰 나룻배를 말하는 것이지만, <하양>이라는 말속에는 그 나룻배의 빛깔과 크기와 무게까지를 함유하는 뜻이 담겨져 있다고 할 수 있다.
여름 한 철 물놀이하는 피서객을 태우고 강을 내달리던 하얗고 조그맣고 가벼운 나룻배라는 의미를 <하양>이라는 말속에다가 담아보려고 했던 것이다.


흰색을 나타내는 우리말은 수없이 많다. 햐얗다. 허옇다, 하얘지다. 허예지다… 흰, 하얀, 허연, 희읍스레, 해읍스레… 우리말은 단순한 서양어와는 달리 <하얗다>라는 의미의 층위를 이루는 감각어가 이토록 풍부하다.
미국 대통령의 관저인 를 우리는 백악관(白堊館)이라고 번역하지만, 이것은 공연히 서양을 동경하는 마음에서 나온 미사여구의 하나일 뿐이다. 미국(美國), 영국(英國), 불란서(佛蘭西) 같은 국명도 다 마찬가지다.

그들이 우리나라를 일컫는 국명은 언제나 다. <코리아>라는 말에 무슨 신린과 미사(美辭)의 정신이 있겠는가. <고려>를 정확히 발음하지 못한 결과일 뿐이다.
또 서양인들은 언제나 우리의 분단현실을 아프게 찌르기라도 하듯 즉 남한(南韓)이라 호칭하고 우리 대통령의 관저인 청와대(靑瓦臺)도 그냥 지붕의 기와 색깔이 푸르다고 해서 라고 부른다.
ㅍ지금 전국은 월드컵 열기로 고조되어 있다.
지구촌 또는 세계화시대라는 말이 실감나는 요즈음이다. 진정한 세계화가 이루어지려면 지구촌의 각 나라들이 대등하게 상대방을 인정하고 이해하는 것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들이 청와대를 <푸른집>이라고 부르는 것과 마찬가지로 백안관을 그냥 쉽게 우리말로 옮겨서 <하얀집>이라고 부르는 것은 어떨까. 하지만 백안관을 하얀 집이라고 하면, 최대 강국의 대통령 관저라기보다는 꼭 생맥주 집 같은 느낌이 들고 또 흰집이라고 하면 상가집 같고 하양 집이라고 하면 너무 조그맣고 가벼워서 연인끼리 차를 마시는 숲속의 방갈로 같은 느낌이 들게 된다.
그렇다면 <허연집>이라고 부르면 어떨까. 크기와 색깔을 두루 아우르는 말이 아닐까.


피부가 허연 대통령이 살면서 심심찮게 섹스 스캔들도 일으키고 자국의 이익추구놀음을 툭하면 인권이나 민주주의로 포장하면서 인정사정 가리지 않고 지구를 쥐락펴락하는 관저니까. 그 분위기에 알맞게 <허연집>이라고 부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자기 나라를 세계 그 자체로 착각하여 월드 시리즈나 세계무역센터니 하는 그들의 버릇이 새삼 괘씸해진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우리의 <푸른집>에 살던 대통령들이 다 영낙없이 정치사에 오점만 남기고 마는 우리 현실을 생각할 때, <푸른집>이라고 그늘이 청와대를 부른 것은 단순히 지붕의 기와 색깔만을 뜻한 것이 아니라 <멍든집>이라는 원형적 상징이 애시당초 스며있었던 것은 아닐지 걱정된다.

서울 출생 / 원주고 졸업 / 고려대 영문과, 동 대학원 국문과 졸업 / 1967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시) / 1969년 대한일보 신춘문예(소설) / 시집 『겨울강』, 『1미터의 사랑』등 / 소설 『처형의 땅』, 『순은의 아침』등 / 고려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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