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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면서 이기는 역설적 전망
2001년 11월 08일 (목) 원주투데이 webmaster@wonjutoday.co.kr
시인 김 정 란
■1953년 서울 출생
■성심여자중·고등학교 졸업
■한국외국어대 불어과 졸업
■프랑스 그르노블 III 대학원 졸업
(문학박사·전공: 프랑스 현대시)
■현재 원주 상지대 인문사회대
부교수
■시인, 문학평론가, 번역가


사회적 현상들에 대한 진단은 언제나 쉽지 않다. 사실 사회에 대한 연구 자체가 그렇게 오랜 연원을 가지고 있지도 않다. 한 사회의 모습은 참으로 변덕스러운 여러 가지 변수들에 매여있고, 각 사회의 특성에 따라 하나의 동일한 원인이 전혀 다른 결과로 나타나기도 한다.


예를 들면, 조국이 외세의 압제에 신음하고 있을 때, 앞장서서 조국을 배반하고, 조국을 노예로 만든 자들의 영광을 위해 조국의 젊은이들을 전쟁터로 내모는 사설을 쓰고, 꽃같은 소녀들을 적군들에게 성노예로 바치는 일에 주저함이 없었던 조선일보같은 언론사가 <민족언론>을 참칭하면서 지금까지도 최고의 발행부수와 최고의 영향력을 발휘하는 일 따위는 우리사회 같은 사회가 아니면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다.


정형근처럼 죄없는 젊은이를 고문당해 죽도록 만드는 데 직접적인 책임이 있는 정치인이 80% 이상의 지지율을 자랑하며 국회의원에 당선되는 일 따위도 우리 사회가 아니면 일어나기 힘든 일이다. 따라서, 한 사회의 여러 가지 문제들은 언제나 <지금, 여기>에서 작동하고 있는 구체적 맥락들을 늘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것을 도외시한 모든 보편적 논의는 거짓이며 사기이다.
나는 지난 몇 년 간 우리사회의 문제들, 특히 언론문제에 대해 발언해 왔다. 그러나 내가 현장에서 느낀 것은, 우리 사회의 아주 많은 사람들이(일반 서민뿐 아니라, 지식인들과 문인들과 예술가들까지), 보편적 가치 창출에 별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누구보다도 엄정한 객관적 사실을 추구해야 할 언론들은 점점더 노골적으로 자사의 이익만을 추구하고, 그런 사실에 대해 점점더 부끄러움도 자의식도 느끼지 않고, 사실을 전달해야 한다는 초보적인 언론의 사명조차 헌신짝처럼 저버린 채,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식대로 사실을 조작하고, 은폐하고, 자신들의 비판자들을 향해 원색적 비난을 퍼부어대고, 자신들의 나팔수 역할을 해주는 문인을 노골적으로 옹호한다.


지식인들은 속편한 보편주의의 잣대를 가지고 거대언론사들을 변호하느라 여념이 없고, 문인들은 그런 신문사들에서 주는 거액의 상금이 걸린 문학상을 받으면서 역사와 공동체적 가치들을 폄하하는 일마저 마다하지 않는다.
젊은 기자들조차 회사의 입장만 앵무새처럼 따라 복창하고 있다. 그리고 국민은 이런 사실에 대해 별 관심이 없다. 나는 이런 사회의 다른 예를 별로 알지 못한다.

한국 사회의 많은 일들은 보편적 가치 기준에 따라 그 스펙트럼을 형성하는 것이 아니라, <이기고 지는 게임>에 따라 형성되는 것처럼 보인다. 사람들은 내가 어떤 가치를 지지하는 가에 따라 삶의 이런저런 구체적 행동방침을 정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편이 이기느냐 지느냐에 따라 정한다.
따라서 모든 것은 파워 게임으로 변질된다. 그 파워게임의 와중에서 보편적 가치는 완전히 실종되어 버린다. 중요한 것은 이기는 자의 편에 우리 편의 자리를 마련하는 것이다.

논리적 정합성, 세계관, 철학, 윤리 같은 것은 쓰레기통에 처박힌지 오래다. 오로지 이길 가능성이 있는 것, 그것만이 진리이다. 따라서 나는 앞으로도 아주 오랫동안, 우리 사회의 비합리성과 싸우는 사람들은 판판이 지게 되어 있다고 본다.


국민의 멘탈리티가 하루 아침에 바뀌는 것을 기대하는 것은 거의 불능에 가까운 이야기이다. 게다가 여론주도층인 언론과 거기에 기대어 상징자본을 분배받고 있는 지식인들마저 그런 멘탈리티에 젖어있는 상황에서 이 싸움이 단번에 성공한다는 것은 기적에 가까운 이야기이다.


따라서 나는 지는 싸움을 하는 사람들이 자꾸 등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패배는 무의미하지 않다.
그것은, 이렇게 말하는 것이 허용된다면, 아주 적극적인 패배이다. 쉽게 이기는 전략적 방책을 택함으로써 훗날 원칙적 경험으로 추적되기 어려운 길을 가기보다는, 어렵게 짐으로써 원칙의 경험을 쌓아두자는 것이다.
그것은 승리자들의 역사 안에서 하나의 단단한 이질적인 단층을 이룰 것이다.

그리고 그 단층이야 말로, 보편적 가치들의 창출 대신에 늘 단기적인 이기기에만 집착해 온 우리 사회 특유의 야영지 문화를 극복할 수 있는 힘찬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지면서 이기는 역설적 전망에 대한 믿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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