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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절초 지면 가을이 간다
2001년 11월 01일 (목) 원주투데이 webmaster@wonjutoday.co.kr
차 한잔의 사색
시인 고 진 하
■강원도 영월 출생
■「세계의 문학」 시인으로 데뷔
■시집 「프란체스코의 새들」,
「우주배꼽」 등
■명상에세이 「영혼을 살아있게
하는 50가지 방법」
■김달진 문학상 수상
■현재 기독교문화포럼 대표

구절초 지면 가을이 간다
구절초가 피면 가을이 오고 구절초가 지면 가을이 간다고 했다. 아침 산책길에 토지문학공원의 작은 동산을 올랐는데, 날씨가 쌀쌀해지면서 하늘빛 구절초 꽃잎들이 지고 있었다. 동산 오르는 길가에 촘촘히 자란 쪼록싸리나무 잎들도 노랗게 물들어 지고 있었다.

가을도 끝자락인가 보다.
산책을 마치고 돌아오는데, 인생의 늦가을에 든 선배가 문득 떠올랐다. 얼마 전 그 선배와 전화 통화를 나누었다. 이런저런 일로 서로 연락을 하지 못하는 동안 선배는 뇌수술을 받았다고 했다. 평소에 건강체로 보였는데, 뇌수술을 받았다는 말에 놀라서 이것저것 그간의 수술을 하게 된 사정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이야기 끝에 선배는 자기가 잘못된 삶의 방식으로 살아온 생을 수술을 담당했던 의사의 이야기를 빌어 뉘우치고 있었다.
퇴원 수속을 밟고 의사를 만났는데, 의사가 이렇게 묻더란다.


“목사님이시죠?”
“네.”
“목사님께서 왜 그렇게 머리를 많이 쓰고 사셨나요? 목사님처럼 뇌 속에 물주머니가 생기는 경우는 드문데, 이 물주머니는 가슴을 잘 쓰지 않고 머리를 많이 쓰는 사람에게 생깁니다. 이젠 앞으로 가슴을 많이 사용하고 사십시오.”
그랬다. 내가 아는 선배는 머리가 명석하고 논리적이고 타산적이다.

아주 평범한 일상 대화에서도 선배는 지나치리만큼 논리적인 사람이다. 때로 선배를 만나면 그가 웃으며 말할 때도 따스함이 느껴지지 않곤 했다. 그 웃음조차 계산적인 웃음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런 선배가 수술 후 나와의 통화에서 잘못 살아온 지난날을 뉘우치며 새롭게 살고 싶다고 했다.


“고 시인, 마침 수술 마치고 나오니까 당신이 보내준 책 <부드러움의 힘>이 와 있어서 요즘 그 책을 읽으며 지낸다네. 잘 될지 모르겠으나 앞으론 가슴으로 살고 싶어. 시도 읽고, 젊은 시절에 취미 삼아 했던 사진도 찍으러 다니고….”
“선배, 잘 생각하셨어요. 할 수 있으면 가슴 뜨거워지는 연애도 좀 하세요.”
목사인 선배에게 연애도 좀 하란 말은 얼토당토않은 말이지만, 인간의 가슴에 무언가 샘솟지 않는 삶이란 곧 죽음의 그것과 무엇이 다를 것인가.

‘사랑의 사막’이란 소설이 있지만 연인이든, 자연이든, 신(神)이든 인간이 그 무언가에 대한 그리움을 잃어버렸다면 그는 살았다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존재에 다름 아니다.
단풍잎 빛깔로 지는 저녁놀을 바라보다가 나는 문득 눈시울이 뜨거워질 때가 있다. 뚝뚝 떨어지는 가로수 길을 걷다가 내 발에 밟히는 마른 낙엽들에게 송구한 느낌이 들 때가 있다. 해가 뜨고 지는 일이며, 잎이 피고 지는 일이 내 삶과 무관치 않다는, 만물과의 일체감 때문이다.


토지문학공원 동산에 사는 청설모가 길가로 내려와 배고픈 거지처럼 쓰레기통을 뒤지는 것을 볼 때, 나는 때로 내 몸의 일부를 짐승들의 먹이로 내주고 싶을 때가 있다. 그렇다. 삶은 얼마나 깊고 넓은 것인가.
선배, 이 메마르고 황량한 시대, 이미 촉촉해지기 시작한 선배의 가슴에 하늘과 바람과 그리움과 시와 사랑을 좀 담고
사소, 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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