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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뭄의 시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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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뭄이 오래 계속되더니, 꿀처럼 달콤한 비가 내렸다. 이제는 너무 많이 와서 걱정할 지경이 되었다. 남쪽지방에 비가 조금 지나치게 오는듯하더니, 다행히 큰 일 없이 지나가는 것같다.
가문 하늘을 보며, 팍팍한 마음속에 먼지처럼 가라앉아있던 불안도 많이 가셨다.
이제 불볕이 쨍쨍 내리쪼이고, 폭풍이 한 차례 불고 지나가면, 푸른 잎사귀들은 더욱 푸르러지고, 뿌리는 부지런히 대지로부터 물을 빨아들이고, 태양빛을 제 안에 차근차근 쟁여넣어 알곡을 향해 제 꿈을 밀어내리라.
때가 이르면, 천지는 황금의 꿈 속에서 한 해 살이의 소산을 고요히 대지에 내려놓으리라.
잎사귀 하나, 열매 하나, 알곡 한 알갱이 안에조차, 생성과 변전과 종말의 모든 드라마를 간직한 채 식물은 제 자리에 꼼짝 않고 서서 제 운명을 거뜬히 치러내는 것이다.
그리곤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식물은 다시 죽음의 운명에 순하고 순하게 응답한다. 그것은 장려하지 않다. 모든 종말이 그렇듯이 그것은 슬프다.
그러나 그 슬픔은 얼마나 겸손하고 진실한가.
내 나이도 지금 가뭄으로 타들어가는 시절을 통과하고 있는 것 같다. 몇 년 새 문학 권력의 문제를 지적하고, 조선일보와의 싸움에 나선 이후로, 내 일상은 편할 날이 하루도 없었다.
뒤에서 퍼부어지는 온갖 오해, 온갖 비아냥, 온갖 욕지거리, 이유를 알 수 없는 끔찍한 증오.
나의 문제제기에 대해 공적인 방식으로 대응하는 문인들은 아무도 없었다.
스캔들을 만들어서 퍼뜨리면서 나의 비판을 부도덕한 것으로 매도하기 위한 음모에만 치중할 뿐이었다.
결국 문인들의 대응방식은 한 남성문인의 파렴치한 행위로 귀결되고 말았다.
그사이 내 마음은 비를 기다리는 가문 대지처럼 갈라터질대로 갈라터졌다.
분노가 내 마음을 벌레처럼 파먹고, 밤새 누군가가 마음속 깊은 곳에서 통곡하는 소리를 들어야 했다.
몸은 늘 벌벌 떨리고, 안압이 올라서 몇 번씩 실핏줄이 터지고, 가슴은 고통으로 헉헉댔다. 하루에도 열두번씩 지옥을 헤매고 돌아다녀야 했다.
아, 이런 거구나.
기득권에 반항하는 것은 이렇게 끔찍한 고통을 요구하는 거로구나. 말하려는 여자들은 이런 시련을 견디다 못해 실성하거나 자살을 했던 거로구나. 나는 견뎌내야 한다고 자신을 다그쳤다.
그러나 정말 힘이 드는 일이었다. 그냥 다 때려치우고 숨어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나를 괴롭혔다.
나야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편하게 살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무엇보다 힘이 드는 일은 내가 고통스럽다는 사실이 아니었다.
정말로 고통스러운 일은, 내가 그런 일들을 통해서 사람에 대한 믿음을 잃어가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사실이었다.
결국 나는 사람을 위해서 싸우기 시작했던 것인데, 그런데 그 사람이라는 것이 이토록 얄팍하고 야비하고 비열하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이 모든 고생이 대체 무슨 의미를 가진다는 말인가. 나는 자신이 황폐해져 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시달렸다.
그러나 걱정하던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외양은 참으로 느릿느릿 변화하지 않고 있지만, 그러나 이미 세상은 안쪽으로부터 균열이 생겨 있었던 것이다.
내가 그 고생을 하고 있을 때, 이름도 얼굴도 알지 못하는 많은 네티즌들이 내 홈페이지로 찾아와 나를 위로해 주었고, 변호사 비용까지 모금해 주었다.
또 많은 지식인들이 내가 겪은 일이 한 사람의 개인이 겪는 일이 아니라, 말하려는 여성에게 가해지는 남성우월주의의 횡포라는 시각을 확립하고 적극적으로 발언해 주기도 했다.
나는 전시대의 여성들처럼 혼자 싸우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더 이상 외롭지 않은 것이다.
어쩌면, 이 힘든 시절을 지혜롭게 통과하고 나면, 내 생 안에도 가뭄과 폭풍과 싸우며 알곡을 만들어가는 식물의 무늬가 생겨날지 모른다.
그러면 사람의 일을 끝내고 숨을 거두어 우주로 다가가게 될 때, 내 애씀과 고통은 역사 안에서 거름으로 작용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러면, 나를 딛고 새로운 여성들이 올 것이다. 더 이상 말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여성들이, 세계의 부조리함을 안으로부터 녹여내어 제 영혼의 양식으로 변형시킬 줄 아는 강하고 아름다운 여성들이 올 것이다.
하느님, 제게 이 험한 시절을
사랑으로 건널 힘을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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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서울 출생
■성심여자중·고등학교 졸업
■한국외국어대 불어과 졸업
■프랑스 그르노블 III 대학원 졸업
(문학박사·전공: 프랑스 현대시)
■현재 원주 상지대 인문사회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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