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람을 본 적이 있나요?」 의 건널목 씨처럼 나에게도 따뜻하고 그리운 사람이 있다. 생각만 해도 눈시울이 묽어지는 그런 사람…. 이제 더 이상 내 가슴속에 묻어두지 않고 자랑스럽게 세상에 따뜻함을 알리고 싶다.

아주 어릴 적, 나는 바쁘신 부모님 사이에서 언니와 함께 할머니 댁에서 자랐다. 방학이 되면, 일주일에 다섯 번은 할머니 댁에서 지냈는데 어려서부터 흙과 동물을 좋아한 덕분에 며칠 시골에 머무는 것이 싫지만은 않았다.

사실 내가 할머니 댁에 가는 것을 좋아했던 가장 큰 이유는 바로 할아버지 때문이다.

언니랑 내가 옹기종기 모여서 그림놀이를 하고 있을 때면 할아버지는 우리의 그림을 옷장에 걸고 1등, 2등을 정해 주셨다.

순위는 항상 번갈아 가며 바뀌었는데 시장에서 사 오신 과자, 귤, 식혜 등 상품도 가지각색 이었다. 여름이 되면 집 바로 밑의 시원한 계곡으로 가서 다슬기도 잡고, 귀여운 올챙이도 구경했다.

할아버지는 우리를 번쩍 들어서 할아버지표 잠수함도 태워 주셨다. 우리가 재미있어서 까르르 거리면 할아버지는 껄껄 웃으시면서 몇 번이고 더 태워 주셨다. 그렇게 시간가는 줄도 모르고 신나게 놀고 있으면 어느새 할머니가 저녁 먹으러 오라고 부추기신다. 밥을 먹을 때에도 할아버지는 항상 우리부터 챙기셨다.

할머니가 생선을 좋아하셔서 식탁에 주로 생선이 올라왔는데 할아버지는 생선가시를 바르느라 식사도 제대로 못하신 적이 많았다.

그도 그런 것이 젓가락질을 잘 못하시는 내가 혹시 가시가 목에 걸리게 될까봐 가시를 모두 발라 연한부분만 내 밥위에 얹어 주시는 것이다. 할아버지는 드시지 않고 나만 먹는 것이 불편해서 할아버지께 말했다.

"할아버지도 먹어."
나는 할아버지 숟가락 위에 부드러워 보이는 생선살을 얹었다.
"괜찮여, 할비는 너네 먹는 것만 봐도 배불러."

먹는 것만 봐도 배가 부르다니. 참 이상한 말이다. 하지만 이제 막 일곱 살이 된 나는 곧이곧대로 할아버지의 말을 믿고 그 후로 밥을 남기는 일이 없었다.

밥그릇을 다 비우고 할아버지에게 들어보였다. 할아버지는 껄껄 웃으시며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다. 할아버지의 웃음소리와 따뜻하고 듬직한 손이 참 좋았다. 밤이 되면 할아버지와 함께 매일 빼놓지 않고 대청마루로 나가서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산 속의 공기 좋은 시골이라 하늘의 별들이 아주 잘 보였다. 수도 없이 촘촘하게 박힌 별들을 보면서 저건 엄마별... 저건 언니별... 하며 이름을 붙이기도 하였다. 할아버지는 별을 보면서 많은 옛날 이야기를 해 주셨다.

거의 할아버지가 지어낸 이야기 들이었다. 할아버지는 내가 행복한 결말을 좋아하는 것을 알고 끝맺음을 항상 "잘살았데~"라고 하셨다.

이야기를 듣다가 잠이 들면 할아버지는 나를 업어서 건넌방으로 데려다 주셨다. 할아버지와 함께 보낸 여름날의 휴식은 정말 달콤했다.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나서부터 할머니 댁에 찾아가는 일이 줄었다. 거리도 거리인지라 한 번 가는데 드는 시간도 만만치 않았다.

그리고 그 해에 어머니가 일을 그만 두셔서 방학 때에도 할머니 댁에 찰 가지 않았다. 가끔 안부전화를 드렸는데 정말 반가워하시는 할아버지의 목소리를 들으니 괜스레 죄송해지고, 잘 찾아가지 못했던 내가 부끄러웠다.

그래서 한 달에 한 번은 꼭 할머니 댁에 가자는 약속을 부모님께 받아 내었다. 농사일을 하시는 할아버지의 모습이 아주 어릴 적 보았던 모습보다 왜소하고 피곤해 보였다. 그래도 할아버지는 나를 꼭 안아주시고 심심하지 않게 짚을 엮어 인형도 만들어 주셨다. 할아버지의 솜씨는 언제나 변함이 없었다.

초등학교를 졸업 할 즈음 나는 어머니께 충격적인 소식을 듣게 되었다. 할아버지가 원래 병을 앓고 계셨는데 병이 갑작스럽게 악화되어서 병원에서 급히 가족들을 부른 것이다. 조마조마하며 우리 가족은 병원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우리를 기다려 주지 않으셨다.

나는 차가운 할아버지의 손을 만져 보았다. 믿겨지지 않았다. 억장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할아버지의 따뜻하고 듬직한 손을 이젠 만 질수도 볼 수도 없다고 생각하니 정말 슬프고 착잡했다.

나는 할아버지가 좋은 곳으로 갔을 거라는 상상을 하며 울지 않으리라고 다짐했다. 내 웃음을 좋아하던 할아버지가 하늘에서 내 모습을 보신다면 속상해 하실 것 같았다.

그렇게 할아버지는 나의 어릴 적 추억에 잠들어 계셨다. 몇 년이 지난 지금 글쓰기 대회를 통해 알게 된 책 속에서 할아버지의 따뜻한 손길을 느낄 수 있었다.

건널목 씨의 배려와 사랑으로 아리랑아파트의 주민들, 도희, 태희와 태석이 까지 긍정의 에너지를 얻지 않았는가! 나의 할아버지도 건널목 씨처럼 만날 수는 없지만 나는 할아버지를 느낄 수 있다. 내 마음속의 화원에서 껄껄 웃으시며 나를 반기는 따뜻한 할아버지의 온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