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회원가입
원주투데이포털 | 6.4지방선거 맛집캘린더
 
  최종편집 : 2015.6.1 월
   
> 뉴스 > 기획특집
     
창간19주년 특별기획: 중국 원주촌, 그 후 10년 ③
'고향 찾아라' 부모님 유지 70년만에 이뤄…
2014년 11월 03일 (월) 김민호 기자 mhkim@wonjutoday.co.kr
   
 

원주투데이는 지난 2005년 창간 10주년 기획취재 '중국 원주촌을 찾아서'를 통해 일제강점기 일제의 선동과 회유, 협박에 의해 만주로 강제 이주된 원주사람들의 이야기를 보도한 바 있습니다.

시대의 아픔을 안고 낯선 타국 땅에 뼈를 묻어야 했던 그들의 이야기에 많은 분들이 관심을 가져주셨습니다.

올해는 중국에 살고 있는 원주사람들의 이야기가 고향에 소개된 지 10년째 되는 해입니다. 원주투데이는 이미 많은 이들의 머릿속에서 희미해진 그들이 궁금했습니다. 당시 우리가 만난 그들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그들이 집단부락을 이루고 살았던 원주촌은 어떻게 달라졌을지….

그래서 다시 원주촌을 찾았습니다. 중국 길림성 조선족 자치구 연길시와 안도현 일대, 도문 등지에서 아직 생존해 있는 이민 1세대와 그 후손들을 만나 그들의 지난 10년의 삶과 고향 원주에 대한 생각을 들었습니다.

1. 프롤로그-만주로 간 사람들
2. 원주촌, 그리고 청구자
3. 남은 사람과 떠난 사람들
4. 민간 교류 20년 '정암촌'
5. 민족혼을 지키는 사람들
6. 좌담회-원주와 중국 원주촌

   
▲ 중국 속 원주마을 원주촌이 실존했던 청구자. 2005년 마을표지석이 있던 자리에는 제법 규모가 큰 노인요양원이 들어섰다.
원주촌 주민들의 고향 찾기

원주촌 이주 1세대인 고 이도구(2008년 작고) 씨는 2007년 남긴 자필 회상기에서 "반드시 고향을 찾으라는 부모님의 유언이 있었다"고 전했다. 이 씨 뿐만 아니라 취재과정에서 만난 원주촌 주민들과 그 후손들은 한결같이 고향 원주에 대한 짙은 그리움을 표현했다.

1945년 광복과 함께 원주촌 주민 중 많은 수가 힘들게 개간한 농토를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간 것도 이에 기인한다. 항일독립운동 원주기념사업회 윤병진 연구위원은 "일제 대륙침략정책의 방편으로 강제이주 당했지만, 원주출신이라는 일체감을 바탕으로 1938년부터 원주라는 행정지명을 사용하며 원주사람으로서의 문화적 정체성을 유지하려고 애썼던 그들에게 고향인 원주 찾기는 당연한 현상"이라고 말했다.

피치못할 사정으로 고국으로 돌아갈 기회를 놓친 후 중국에 남은 사람들도 고향과 핏줄에 대한 그리움은 다르지 않았다. 고 이도구 씨는 안도현 정치협상회 비서장까지 지냈을 만큼 중국 내에서도 탄탄한 위치에 있었지만, 매일 밤이면 한국 라디오 방송에 귀를 기울일 만큼 고향소식을 그리워 했다.

이 씨의 딸 계덕(51) 씨는 "이산가족방송에 사연을 띄우기 위해 편지를 쓰면서 눈물을 흘리는 아버지를 여러번 목격했다"면서 "고지식하고 의지가 강한 분이셨지만 혈육에 대한 애정과 고향에 대한 그리움은 누구보다 컸다"고 말했다.
 
70년만에 받든 부모님 유언

고 이도구 씨는 독립운동가 이면직 선생의 장손이다. 조부 이면직 선생은 1919년 4월 8일 고향인 지정면 보통리 자갑촌(自甲村) 뒷산에서 주민 13명을 이끌고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주도했다가 당시 일경에 피체,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6월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으며, 이후 고문 후유증으로 1932년 사망했다. 선생 사망 후 이 씨의 가족은 일제의 회유와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중국 이민길에 올라 숱한 고초를 겪어야 했다.

할아버지의 명예회복과 조국을 찾고 싶다는 이 씨의 바람은 한국에 나와 있던 셋째 딸 계덕 씨와 사위 강영철 씨를 통해 고향 원주에 알려졌고 박찬언 원주향토문화연구소장, 윤병진 항일독립운동 원주기념사업회 연구위원, 고 이양구 전 우산초교 교장 등 지역인사들의 도움으로 마침내 결실을 보게 된다.

2003년 광복절에 이면직 선생이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았고 이를 통해 이도구 씨와 아들 원복(53) 씨, 막내 딸 계영(44) 씨가 대한민국 국적을 취득하게 된 것이다. 2006년 4월에는 셋쩨딸 계덕(51) 씨가, 그해 6월에는 독립운동 유공자 등에 대한 특례 규정에 따라 큰 딸 계숙(59) 씨와 둘째 딸 계순(56) 씨를 비롯해 둘째 사위 임순용(56) 씨, 셋째 사위 강영철(51) 씨, 막내사위 임인주(46) 씨, 며느리 김명숙(43) 씨 등 일가족 6명의 특별귀화가 허락됐다.

이 씨는 당시 감회에 젖은 목소리로 "할아버지가 온 몸을 바쳐 지키고자 했던 고국에 대한 사랑을 잊지않고 남은 여생을 살겠다"고 했다. 이 씨가 고국을 다시 찾기까지 걸린 세월은 70여년이었다.

기회의 땅 한국…상처의 땅 고국

고 이도구 씨의 셋째 딸 이계덕 씨와 강영철 씨 부부에게 한국은 희망의 땅이었지만 많은 아픔을 안겨준 곳이기도 하다. 한중 수교 이후 1999년 한국에 들어 온 계덕 씨는 미싱사, 모텔 청소, 야간식당 주방일까지 안 해 본 일이 없다고 했다.

작은 봉제공장에서 미싱을 돌릴 때는 하루 2시간씩 연장근무를 하고도, 야간에는 인근 식당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초등학교 교사였던 남편 강 씨도 한국으로 들어 와 인테리어를 하는 친구를 따라 공사현장에서 땀을 흘렸다. 생전 처음 해보는 일이었지만 낯선 한국땅에서 이들에게 선택의 길은 많지 않았다.

조선족이고 불법체류자라는 신분은 이들 부부에게 혹독한 아픔을 감내하도록 했다. '너무 성실하다', '열심히 일한다'고 칭찬 일색이던 공장 사장은 막상 급여를 줄 때면 돌변했다. 이런 저런 이유로 차일피일 미루더니 나중에는 불법체류자라는 신분을 들먹이며 협박을 일삼았다. 남편 강 씨도 공사대금을 떼인 일이 한 두번이 아니다.

다시 중국으로 돌아갈까도 생각했지만 한국으로 나오기 위해 큰 돈을 쓴 뒤라 그마저도 어려웠다. 강 씨는 "당시 한국에 나오기 위해 중국돈으로 10만원 정도가 들었다"며 "보통 중국에서 20년은 모아야 손에 쥘 수 있는 큰 금액"이라고 말했다.

이 씨는 떼인 임금을 돌려받기 위해 관계기관을 찾았다가 마음에 상처를 받기도 했다. 자신의 이야기를 들은 담당직원이 "왜 제 때(체류기간) 돌아가지 않고 한국에 남아 고생을 시키느냐"며 핀잔을 줬기 때문이다. 이 씨는 "우리가 만약 미국에서 온 교포였다면 그런 이야기를 할 수 있었겠느냐"며 "중국에 가고 싶어 갔던 것도 아닌데… 앞에서는 다 같은 동포라고 하지만 뒤에서는 그저 중국인으로 취급하는 사람이 많았다"고 눈물을 보였다.

떠난 부모와 남겨진 아이들 또 다른 이산

현재 서울 영등포구 신길동 주택가 2층 월세집에 살고 있는 이계덕·강영철 씨 부부는 올해 중국에 있는 아들을 한국으로 데려왔다. 그동안은 사정이 여의치 않아 아이들은 중국에서, 부부는 한국에서 떨어져 지내야 했다. 부모와 떨어져 조부모 손에 자라는 아이들을 1년에 한 두번 만날 때마다 '이렇게 살아야 하나'라는 자괴감도 들었지만, 그 때마다 이를 악물었다고 했다.

사실 아이들을 한국으로 데려오지 않은 것은 형편이 좋지 않기도 했지만 중국에서 나고 자란 아이들이 한국사회에 적응할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선 이유가 더 컸다. 다행히 초등학생인 아들은 이번 학기 학급 회장으로 선출될 정도로 제법 적응을 잘 하고 있다.

그러나 대학생인 딸은 아직도 중국에 남아있다. 이 씨는 "중국에서 태어나 교육을 받은 아이들이기에 한국보다 중국에서 사는 것이 더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면서 "어떤 선택을 하게될진 모르지만 아이들의 뜻에 맡기려고 한다"고 말했다.

원주촌 이주 1세대 김광복(2008년 작고)·김진복(81) 씨의 장남 김동준(62) 씨는 말 그대로 홀아비 신세다. 존경받는 한의사로 안도현 보건진료소의 책임자로 있지만 퇴근 후 돌아 온 텅 빈 집은 고요하기만 하다. 아내와 아들이 모두 한국에 나와 있어 홀로 지낸지가 벌써 10여년이 다 되어간다. 현재 아내는 서울 식당에서 일을 하고 중국에서 대학을 졸업한 아들은 서울에서 치킨집을 준비중이다.

이 같은 상황은 김 씨 주변도 비슷하다.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으려 만주로 떠난 선각자들과 일제의 강압으로 이 땅을 등졌던 민초의 후예들이 2014년 현재 또 다시 이산의 아픔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
 
조선족 사회의 급격한 변화

최근 연변자치주 내 조선족사회는 위기에 직면해 있다. 중국 정부가 2010년 조사해 올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연변자치주 내 조선족 수는 183만명. 1990년 199만명과 비교하면 16만명, 2000년 192만명과 비교해도 9만명이 줄었다. 인구 분포에서도 연변자치주 내 전체 인구 중 조선족 비율은 2010년 기준 36.2%에 불과하다. 1952년 80%를 점유했다는 것을 고려하면 60년만에 급격한 변화를 맞고 있는 것이다.

인구감소와 맞물려 공동체도 급격히 붕괴되고 있다. 원주촌과 같은 조선족 부락에서 조선인들이 떠난 뒤 그 빈 자리를 한족이 들어와 채우고 있다. 조선족 부락은 점차 감소하고 한족 마을이 늘어나고 있는 것. 가장 큰 이유는 경제활동을 위한 한국행이다.

손춘일 연변대 교수는 "200만명도 되지않는 소수민족인데 한국에 나간 수만 70만명으로 추산하고 있다"며 "노인이나 불구자를 빼고는 모두 한국에 나갔다는 자조섞인 말이 있을 정도로, 현재 조선족 사회에는 아이들과 노인들만 남고 젊은사람들은 찾아보기 힘들다"고 말했다.

이주 2세대 김동준(62) 씨도 "요즘에는 노인들이 돌아가셔도 상여를 멜 사람이 없어 장사를 지내기 조차 어렵다"면서 "집안에 어른이 돌아가시면 2개 부락을 합쳐 상여꾼을 구해야 할 정도"라고 말했다.   

 "내 어머니 민성녀 여사 의병장의 딸 자랑스러워"
민 의병장 외손자 김명윤 씨

   
 
중국 길림성 안도현과 연길시 일대에는 원주촌 주민들처럼 일제의 회유와 협박에 속아 강제 이주한 사람들도 있지만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일제의 눈을 피해 만주로 피신한 애국열사와 그 후손들도 있다.

중국 길림성 연길시 하남가 백설위에 위치한 23평 서민아파트에 살고 있는 김명윤(78) 씨도 그 중 한 명이다. 김 씨는 올해 순국 106주기를 맞은 항일 의병장 민긍호 선생의 외손자다.

민긍호 의병장은 슬하에 1남 1녀를 남겼다. 카자흐스탄의 피겨 영웅 데니스 텐을 통해 아들 민영욱 선생과 그 후손들의 근황은 국내에 여러번 소개됐지만 딸 민성녀(1977년 작고) 여사와 후손들은 그동안 중국으로 출가했다는 소식만 전해질 뿐 행방은 찾을 길이 없었다. 다행히 김 씨와 항일독립운동 원주기념사업회가 연락이 닿아 최근 민 여사의 후손들이 중국에 거주하고 있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항일독립운동 원주기념사업회에 따르면 민 의병장은 가족의 안위를 염려해 안중근 의사에게 가족을 의탁했다. 안중근 의사의 도움으로 사할린에 거주하던 남매 중 아들 민영욱 선생은 스탈린의 중앙아시아 이주정책에 의해 지금의 카자흐스탄으로, 딸 민성녀 여사는 양양출신의 김규현(1945년 작고) 씨와 혼인 후 연해주와 훈춘을 거쳐 연길과 용정에 정착했다.

민 여사의 2남3녀 중 막내이자 둘째 아들인 김 씨는 어머니 민 씨를 "글을 쓰고 읽을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주변에서 인정할 만큼 명석하셨고, 여장부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분이었다"고 기억한다. 틈틈이 외할아버지 민긍호 의병장에 대한 이야기도 들려줬다고 했다.

"생김새부터 일본군과 담판을 지은 이야기, 용맹하게 싸운 이야기까지 한 번 입을 열면 쉴 틈이 없었다"고 소개한 김 씨는 "그 때마다 의병장 딸이라는 것을 자랑스러워 하셨고 의병장의 후손으로 부끄러움 없이 살아야 한다는 것을 늘 강조하셨다"고 전했다.

연변TV 방송국에서 기술진으로 일하다 지금은 퇴직한 김 씨는 "어머니의 사진을 꺼내볼 때마다 죄송스럼움을 금할 수 없다"고도 했다. "용정 형님 댁에서 지내시다 돌아가신 후 '말발굽산'이라 불리는 인근 동산에 장례를 치렀는데, 그 일대에 스키장이 들어서면서 지금은 묘소조차 찾을 수 없게됐다"는 설명이다. 그는 "후에 몇번이고 찾아봐도 어머니 묘소를 찾을 수 없었다"며 "못난 자손들이 제대로 모시지 못했다"고 자책했다.

김 씨는 "한국 방송과 언론을 통해 카자흐스탄에 살고있는 외삼촌 후손들의 근황도 잘 알고 있다"면서 "더 늦기전에 원주에 있는 외할아버지 묘소를 찾아 뵙고 카자흐스탄에 있는 사촌들과도 만나고 싶다"고 했다.

※이 기획취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원을 받아 이뤄졌습니다.
 

     관련기사
· 창간19주년 특별기획: 중국 원주촌, 그 후 10년 ①· 창간19주년 특별기획: 중국 원주촌, 그 후 10년 ②
김민호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 원주투데이(http://news1042.ndsoftnews.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저작권문의  

     
전체기사의견(0)  
 
   * 200자까지 쓰실 수 있습니다. (현재 0 byte/최대 400byte)
   * 욕설등 인신공격성 글은 삭제 합니다. [운영원칙]
전체기사의견(0)
기획특집: 시민의 발 시내버스, 인구
사건사고 브리핑
귀래 사랑의집 48년 악연 끊었다
4월 원주지역 아파트 매매 실거래가
제16회 장미축제…축하공연·체험행사
행구동 아파트 거래현황…현대아파트 3
제11회 청소년축제 성황
원주천에서 수달 서식 목격
(주)인성메디칼 원주 이전 지역주민
원주문화재단, 누구를 위해 존재하나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이메일무단수집거부
강원도 원주시 서원대로 158 5층(단계동)  |  대표이사 오원집  |  Tel : 033)744-7114 / Fax : 033)747-9914
발행인: 심형규  |  편집인: 오원집  |  등록년월일: 2012년 4월 9일  |  등록번호: 강원 아 00125  |  사업자등록번호: 224-81-11892
Copyright 2009 원주투데이.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jtoday1@wonjutoday.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