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주 정착 16년…한 해 스무번 넘는 제사 진두지휘

지정면 안창1리에는 연안 김씨 연흥부원군 김제남(金悌男) 선생의 종택이 있다. 위엄 있는 크기와 고풍스러움에 압도되는 그곳에 들어서자 푸른 눈의 중년 여성이 푸근한 미소로 맞이한다. 바로 이 집의 종부(宗婦) 김 카렌(65, Kim karen) 씨다.

그녀의 한국이름은 '가련(佳蓮)'이다. 아름다운 연꽃이라는 뜻이다. 이름처럼 그녀의 미소는 꽃처럼 아름답다. 아마도 그녀의 남편이자 연안 김씨의 14대 종부 김일주(73) 씨가 종손이라는 무게를 감수하고도 한국여성이 아닌 미국인인 그녀와 결혼한 이유가 이러한 미소 때문이 아닐까?

카렌 씨는 종부로서 집안의 대소사를 책임질 뿐 아니라 1년에 20번이 넘는 제사를 진두지휘 한다. 인목대비의 아버지인 연흥부원군의 불천지위를 비롯해 기제사와 시제를 모두 합하면 한 달에 두 번 이상 제사를 모시는 셈이다. 제사 뿐 아니라 찾아오는 종친들이 드실 음식까지 모두 정성을 다해 손수 마련하는 그녀는 종부로서의 기품이 완연하다.

"음식을 준비하고 집안일을 하는 것은 문제될 것이 없었지만 종부로서의 위치에 부담감을 느낀 적이 많았다"고 말하는 카렌 씨는 미국에는 없는 종가와 종부의 문화를 이해하고 적응하는데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두 사람이 어떻게 만나서 결혼을 하고 원주에서도 외곽에 위치한 안창리까지 오게 됐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으로부터 47년 전 18살 갓 대학생이 된 카렌 씨와 26살의 청년이었던 남편 김 씨는 미국 오하이오주의 작은 도시 캔튼에서 운명의 만남을 맞이했다. 유학길에 오른 김 씨는 미국에서 태권도장을 하고 있었다. 카렌 씨의 친구 남편이 가라데도장을 열었고, 그 개관파티에서 첫 눈에 반해 사랑에 빠졌다.

이후 부모와 종친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미국에서 결혼식을 올렸으며 슬하에 세 딸을 두었다. 김 씨의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종손으로서의 역할과 책임을 다하기 위해 1995년 원주에 정착하게 됐다. 카렌 씨는 두 부부의 모교인 미국 캔튼대학에서 영문학 강의를 했던 경험으로 서강대에서 교편을 잡아 2년간 학생들을 지도했지만 종부로서의 역할과 병행하기에는 힘이 들었다.

그 이후부터 그녀는 집안일에만 전념했고 서툰 한국어와 낯선 환경에 마음고생도 심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녀는 남편 김 씨와의 사랑으로 현명하고 기품 있는 종부로서 잘 적응해나갔다. 평소 필요한 생필품은 마트를 이용하지만 제수음식을 고를 때는 꼭 재래시장을 찾는 카렌 씨를 알아보고 덤을 주는 상인들이 늘어날 정도로 이제 동네에서는 유명인사다.

남편 김 씨는 "항상 부인이 고맙고 사랑스럽다"면서 "친구들도 오히려 한국인과 결혼했다면 이렇게까지 종부의 역할을 극진히 하지 못했을 것이라며 카렌을 항상 칭찬한다"고 말했다.

카렌 씨는 "이제는 나이도 많이 들었고 자식들도 다 성장했으니 편안하게 여행을 다니고 싶기도 하지만 집안에 돌볼 일들이 아직 많다"면서 "설령 남편이 나보다 일찍 죽더라도 끝까지 남아서 종부로서의 역할을 다 할 것"이라고 자신 있게 말한다. 한국과 원주를 너무나도 사랑한다는 그녀에게는 누구보다 한국적인, 한 집안을 이끄는 종부로서의 위엄이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