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말탑 앞에 선 아이들의 입에서 실망의 소리가 터져나온다. '에이 이게 뭐야, 아무것도 없잖아' 그러고 보니 아침 바다는 해무와 장마구름을 이고 있어서 시계 제로에 가까웠다. '그러게 정말 아무것도 안보이는구나' 금방이라도 울음이 쏟아질 것 같은 얼굴이다.

열하루 동안 땡볕과 허기와 목마름과 물집과 외로움을 등에 지고 걸으면서도 그곳에 가면 뭔가 근사한게 있겠지 싶었는데 감동은 커녕 탁트인 바다 풍경조차 선물로 받지 못했으니 억울할 만도 하겠다. 그래, 결과가 늘 땀 흘린대로 찾아오지는 않는구나.

곡성에서 출발하여 섬진강 보성강을 따라서 송광사가 있는 조계산을 넘어 순천만까지 갔다가, 강진마량 바다길과 정다산 유배길, 땅끝길까지 남도길 오백리를 걸어서 가자는 여행 계획을 내놓을 때만하더라도 아이들은 설마하던 눈치더니 막상 떠날 날이 가까워오자 '안가면 안되나' '아파서 못간다' '공부해야 되는데' 하면서 꾀를 파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막상 도상훈련 삼아 운동장에서 텐트치고 코펠밥 해먹고 했더니 슬그머니 꾀주머니를 감춘다. 좋아하는 친구와 단둘이 텐트잠을 잘 생각에 통증도 다 사라져버린 것이다. 그래, 생각이라는 것도 그렇게 마음먹기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것이지.

첫날부터 섬진강 길을 칠십리 남짓 걸었다. 베낭짐 줄이라는 말 무시하고, 언젠가는 꼭 필요하겠지 하는 욕심에 바리바리 다 싸담고, 거기에다가 텐트하고 쌀봉지까지 얹으니 무게가 장난이 아니다. 배낭무게가 업보의 무게라는 말을 알듯 말듯도 한데 그래도 첫날부터 포기할 수 없어 '아이고 나 죽네, 내가 이런 여행 다시는 오나봐라' 하면서 걷노라니 트럭 아저씨가 태워주겠다며 차를 세운다.

지옥문 앞에서 탈출하는 심정으로 일단 타고 보았더니 아뿔싸 십리만 더 걸으면 될 거리였다. 걸어서 도착한 친구들은 아무 말 안하지만 그래도 뒤통수가 뜨뜻하여 저녁밥 해먹는 내내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래, 나 혼자 편하자는 일에는 반드시 댓가가 따르는 거였지.

밀 보리를 거두고 늦은 모내기를 하는 들녘이 분주하다. 긴 장화신고 괭이를 자전거에 매달고 가던 아주머니가 한마디 하신다. "워디서 오는 애기들이다냐" "원주요" "원주? 거서 여가 어딘데, 애기들이 걸어서 댕긴다냐 어매 워짜야쓰까 잉, 짠혀서 어쩔끄나 잉" 하시더니 다시 나타나 비닐 봉지 하나를 손에 꼭 쥐어주신다. "끔이라도 씹으면서 가드라고 안심심허게" 그래 이런 분들이 있으니 이 길이 걸어갈 만한 거겠지.

도로에서는 자동차들이 쌩쌩 내달린다. 우리나라에 이렇게 큰 차들이 많았던가 싶다. 이 덩치들은 '이 길은 내 길인데 왜 사람들이 함부로 다니는거야' 하면서 위협하는 것 같다. 어디를 가나 웬만한 도로는 다 4차선이어서 그런지 차들은 더욱 빠르다.

그 곁으로 잔뜩 움츠러든 달팽이 마냥 흔적도 안남기고 걷는다. "우리는 한 시간 동안 걸어서 십리를 가는데, 저이들은 달려서 이 백리를 가는거네요. 그렇게 빨리 달려서 어디로 가는 걸까요?" "그러게 말이다. 다 집이거나 일터거나 아니면 놀러가는 길일텐데 말이지" "그런데 우리는 왜 맨날 걷는 여행만 해요?" " 그러게 말이다"

만덕산 백련사 주차장이 하루 집터가 되었다. 노송숲 위로 하얀 초생달이 걸리고 밤바다는 가뭇하다. 밥을 끓여먹고 난 뒤 아이들 몇이서 가로등 아래로 모여든다. 윤밴의 애국가에 맞추어 꼭지점 춤을 시작한다.

아이들 몇이 합세하더니 금새 달밤의 군무가 된다. 이 깜짝공연의 관객은 기운 잃은 선생 몇과 집이 그리워진 어린 순례객 몇과 독경에 범종 소리만 듣고 살았을 만덕산의 초목들이다. 그래 아이들은 저렇게 제 멍석 제가 깔고 제 신명에 한판 신나게 놀줄 아는 존재들이지. 그러고 보니 길 위에서는 아이나 어른이나 공평하게 자란다.

땅끝에 도착한 리무진 버스에서는 또래의 아이들 한무리가 내렸다가 모노레일을 타고 전망대에 올랐다가 30분만에 어딘가로 떠난다. 그래 어딘가에는 또 바쁘게 살아가는 이들도 있어야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