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금 받기에 그림 그리며 편안하게 살 수도 있지만 혼자 즐기며 사는 게 주민들한테 미안했어요. 그래서 양귀비꽃 심어 매력 있는 마을을 만들고자 했지요."

원주에서 양귀비꽃 전도사로 통하는 김용길(60) 풍차꽃농장 대표는 박정희·전두환·노태우 대통령과 한솥밥을 먹으며 상관으로 모셨던 특이한 이력의 소유자다. 육사를 졸업하고 청와대 경비소대장으로 근무하면서 박정희 대통령과 인연을 맺었고 보안사령부로 자리를 옮겨 전두환·노태우 대통령을 차례로 상관으로 모시는 등 군부 출신 대통령들과 인연이 깊다.

2006년 대령으로 예편한 후 원주에서 제2의 인생을 시작했다. 경기도 부천 출신이지만 전원생활을 하고 싶어 정착할 곳을 찾다가 2005년 4월 판부면 서곡리에 자리를 잡았다. "원주는 국립공원과 섬강, 남한강 등 천혜의 자연조건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도로가 사통팔달로 연결돼 있어 살기좋은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김 대표는 원주에 정착하게 된 이유를 이같이 설명했다. 원주와의 인연은 육사 재학시절 36사단 내에 있던 1군 하사관학교에 배치받아 서곡사격장에서 훈련을 받은 것이 전부라고 한다.

김 대표가 서곡에 자리를 잡은 뒤 가장 안타깝게 생각한 것은 천혜의 자연환경이 갖춰져 있는데 휴가철에만 사람들이 몰린다는 점이었다. 휴가철이 아닌 다른 계절에도 사람들을 불러들일 묘안이 없을까 생각하다 꽃을 심기로 했다. 처음에는 관상용으로 많이 심는 튤립을 생각했다가 개화기간이 짧아 포기하고, 전국을 돌며 알아본 끝에 경기도 포천의 view 식물원에서 양귀비 꽃밭을 보고 무릎을 쳤다.

화려한 색감의 양귀비꽃은 사람들 눈을 사로잡기에 충분했고 개화기간도 한 달이 넘어 관람객들을 끌어 모으기에 적합해 보였다. 양귀비꽃을 심기로 마음먹고 2005년 10월 1천300여㎡에 양귀비꽃 씨를 뿌렸다. 그리고 2007년 6월 새농촌건설운동을 벌이고 있는 마을 사람들을 설득해 양귀비꽃축제를 개최했다. 마을축제 형식으로 개최했지만 주민들이 반신반의하는 바람에 축제 전반을 김 대표가 도맡아 진행했다. 하지만 방문객들의 반응은 예상보다 좋았다.

"연금을 받기 때문에 좋아하는 그림이나 그리며 편안하게 살 수도 있었지만 혼자 즐기며 사는 게 주민들한테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양귀비꽃을 심어 매력 있는 마을을 만들겠다고 생각했지요." 김 대표가 양귀비꽃을 심게 된 이유다. 양귀비꽃축제는 올해로 벌써 4년째다. 양귀비꽃을 심은 면적도 계속 늘어나 지금은 2만2천여㎡에 달한다. 처음에는 무료로 개방했지만 지난해부터는 축제의 품격을 높이기 위해 유료로 전환했다. 주민들의 관심과 참여도 처음과는 달라졌다. 꽃밭을 조성하는 일은 물론 축제기간 동안 입장료를 징수하고 먹을거리장터를 운영하는 등 마을축제로서의 면모를 갖춰가고 있다. 올 겨울에는 주민들을 대상으로 체험프로그램 운영교육을 실시해 내년 축제부터는 축제 전반을 주민들이 직접 맡아 진행하도록 할 계획이란다.

양귀비 축제를 개최하면서 곤혹스러운 일도 적지 않았다. 양귀비꽃을 재배한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경찰서 마약단속반에서 꽃씨를 채취해 조사를 벌였는가 하면 지난해에는 양귀비꽃 대중화를 위해 관람객들에게 씨앗을 나눠줬는데 어떤 사람이 마약 양귀비 씨를 섞어 재배하다 적발돼 출처조사를 받기도 했다.

양귀비꽃축제를 판부면 서곡리의 마을축제로 승화시킨 김 대표는 새로운 꿈을 꾸고 있다. 우리나라 최초로 농민미술전시회를 개최하는 꿈이다. "농사를 짓는 투박한 손으로 그린 그림들로 전시회를 열어보고 싶어요. 생각만 해도 멋있지 않을까요."

2006년 화가로 정식 등단한 김 대표는 이 꿈을 이루기 위해 지난 3월 '아름세그림동아리'를 창립시켰다. 10여명이 회원으로 참여했는데 이중 절반은 마을 주민들이란다. 김 대표는 매주 화요일 2시간씩 이들을 대상으로 미술강좌를 열고 있다. 농사만 짓던 주민들이 그림을 그리는 일이 쉬운 건 아니지만 3~5년 후 전시회를 열겠다는 목표로 꿈을 키워가고 있다.

은퇴 이후 더욱 활발하고 왕성한 활동을 펼치며 젊은이 못지않은 구상과 톡톡 튀는 아이디어로 농촌마을을 바꾸어 가고 있는 김 대표. 편안하고 여유로운 삶을 살수도 있지만 자신이 가지고 있는 능력을 주민들과 공유하고 있는 김 대표의 순수한 열정은 나이가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이 무엇인지를 새삼 깨닫게 한다. 가족은 부인 이명선(58) 씨와 1남1녀.

이혜원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