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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 근대화와 함께 한 기독병원 50년
전쟁으로 피폐해진 상처 치유…꿈 안겨줘
2009년 11월 02일 (월) 김상희 기자 shkim@wonjutoday.co.kr
   
 
  ▲ 2009년 개원 50주년을 맞은 원주기독병원 전경.  
 

6.25 전쟁이 끝난 직후 원주 시가지는 전쟁으로 인해 곳곳이 파괴돼 있었다. 도시기반시설은 비좁고 낙후돼 있었으며 이곳저곳에서 휩쓸려온 피난민과 극빈자로 득실거렸다. 그런 상황에서 미국 선교사들이 의료선교를 위해 병원을 설립했고 전쟁으로 피폐해진 원주사람들에게 장밋빛 꿈을 심어주기 시작했다.

의료기관으로서의 역할은 기본이고 지역사회 복지와 교육, 문화영역까지 품어 내며 지역주민들과 소통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민간부분에 있어서 원주 근대화를 견인하는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그렇게…50년이 흘렀다. 원주기독병원 초창기 이야기들을 중심으로 50년 발자취를 되짚어 본다. 한정된 지면이기 때문에 자료나 기록보다는 초창기 병원에 근무했던 사람들의 얘기를 중심으로 원주기독병원이 원주에 있어 어떤 존재인지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데 초점을 맞췄다.

원주기독병원 탄생 배경
   
 
  ▲ 기족병원 초창기 외래 접수창구. 당시 병원을 찾은 원주시민들의 모습이 정겹다.  
 

 이야기를 풀어내기에 앞서 원주기독병원의 뿌리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병원의 효시는 1913년에 설립된 스웨든감리교병원에서 부터 시작된다. 1913년 미국감리교 선교부가 세운 스웨든감리교병원은 1882년 한미수교 후 1900년 초 미국과 캐나다의 의료선교활동을 위해 건립됐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폐쇄된 후 광복을  거쳐 1955년에 가서야 기독병원 설립이 구체화되기 시작됐다.

해방 전 강원도에는 카나다연합교회선교부가 설립한 함흥제정병원이 유일한 병원으로 운영되고 있었는데, 해방 후 북한강점으로 함흥에 되돌아가지 못하게 된 카나다연합교회선교부와 당시 원주에 선교병원을 설립하려는 미국감리교선교부의 이념일치로 연합기관을 설립하게 된다. 이것이 오늘날의 원주기독병원이다.

창립멤버였던 김재수 전 연세대 원주캠퍼스 교수는 "당시엔 대부분의 병의원들이 호칭에 '연합(Union)'이라는 문구를 사용하고 있었는데, 보건사회부가 병원의 권위를 높게 보이려는 경향이 짙다며 병원 호칭에서 '연합'이라는 용어를 빼라는 지시가 내려왔고, 이사회 논의 끝에 '원주기독병원'으로 변경했다"고 전했다.
 
새로운 문화를 접하다

70년대 원주의 의료상황을 보면, 1942년 1월 개설된 도립 원주병원과 59년 원주연합기독병원, 70년 성바오로병원 등 병원 3개, 의원 22개, 의사수 71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의사 1인당 인구수는 지역별로 서울이 1천157명, 충북 9천490명, 강원도가 7천208명이었는데, 원주에 71명이나 있다는 것은 당시 원주인구 11만4천명에 비교해볼 때 의사 1인당 인구수가 1천600명, 즉 서울 다음가는 수치였다. 당시 선진국들도 평균 의사 1인당 인구수가 1천명이었으니, 원주 주민은 동시대 좀 더 선진화된 의료혜택을 받고 있었던 것이다.

서구화된 의료체계를 갖춘 원주기독병원은 원주 주민들에게 문화적 충격으로도 다가왔다. 시로 승격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원주 시가지는 전쟁으로 인한 피해가 복구되지 않은 상태였고 정치적으로도 혼란 속에 있었다. 큰 건물이라곤 군인극장밖에 없었고 이동수단으로는 지게꾼을 이용하곤 했다. 그마저도 타지에서 기차를 타고 원주에 도착해 큰 짐을 실어 나를 때 사용했으며, 대부분은 걸어서 이동했다. 그래서인지 기독병원 위치가 사람의 왕래가 가장 빈번한 시내중심부에 있는데도 당시에는 "왜 이렇게 먼 곳에 병원을 지어놨느냐"며 푸념하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그럼에도 원주시민들은 특별히 불편한 곳이 없어도 병원을 자주 찾곤 했다. 구내에 아스팔트가 깔려있고 스팀난방시설에 온수가 나오는 병원은 지상낙원과도 같았다. 직원식당을 보고는 "천당이다"라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였다. 당초 임상병리과에서 근무했던 박봉림 전 도의원은 "복도가 항상 반들반들해서 그런지 대부분의 시민들이 신을 벗고 들어왔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시민들 사이에선 '그곳엔 선교사가 있고 좋은 약이 많이 있다'는 소문이 '반드시 기독병원이어야 한다'는 의식으로 자리 잡았다. 사대사상도 작용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여튼 "죽든 살든 기독병원에 가야한다"는 환자들이 타 지역까지 퍼져 인제 아산병원에 파리가 날린다는 후문도 있었다.

   
 
  ▲ 1966년 기독병원 전경. 사진 중앙 윗쪽 산 밑 부분이 기독병원이다.  
 

주민과 소통하다  

원주기독병원의 근본이념은 '종교와 국적, 계급과 정당, 치료비 부담 능력의 차별 없이 의료를 필요로 하는 모든 환자에게 기독교적 사랑으로 치료'하는 것이었다.

그 이념에 따라 병원으로서는 국내 최초로 'Social Walker(사회사업가)'제를 실시했다. 이들은 형편이 어려운 환자들과 상담하고 치료비를 지원해주는 역할을 담당했다. 당시는 시대적 상황이 그러했듯 형편이 어렵지 않은 사람이 없었고, 환자의 70~80%가 지원대상이 됐다. 소셜워커들은 환자들 집집마다 방문해 어려움을 듣고 보다 더 가난하고 보다 더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선정·지원했다.

창립멤버였던 김재수 전 연세대 원주캠퍼스 교수는 "소셜워커들은 병원 일뿐 아니라 지역 청소년들을 위한 봉사활동도 실시했다"고 전했다. 병원에 야간학교를 열고 거리의 방황하는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야학을 실시하는 것이다. 한 번은 한 학생이 경찰서에 잡혀간 일이 있었는데 24살 된 소셜워커가 경찰서로 달려가 50대 경찰서장에게 큰 소리를 낸 일도 있었다. 부당한 일을 지나치지 않았던 것. 당시만 해도 50년대, 지금으로서도 상상하기 힘든 일이지만 그들이 갖고 있는 열정과 사랑은 무엇도 두렵지 않은 커다란 힘이었다.

그런 한편, 선교사 부인들도 원내 영어회화반을 열고 시민들을 상대로 무료로 영어를 가르쳤다. 하루 30~40명의 시민들이 병원으로 찾아와 영어를 배우곤 했다고 한다.

   
 
  ▲ 1976년 연세대와 합병 후 가진 기념식 행사.  
 
지역 문화 선도  

전쟁의 여파로 삭막한 나날을 보내고 있던 시절, 미국에서 오랫동안 생활해 서구화된 사고방식을 갖고 있던 제2대 김영우 원장은 평소 좋아하던 장미꽃을 병원 곳곳에 심어 병원을 찾는 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하곤 했다.

당시 원주엔 장미가 거의 없었던 데다 시민들은 장미를 가꾸어 놓고 즐길 생활수준도 못 되었다. 병원의 장미를 접한 시민들은 장미에 대한 호감이 늘어가기 시작했고, 이것이 원주 내 장미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데까지 영향을 미치면서 원주장미클럽이 조직됐다. 얼마 되지 않아 원주시는 시화를 선정하기 위해 시민들을 상대로 공모에 나섰는데, 단연 장미가 우세해 원주시화로 지정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원주기독병원은 매년 장미전시회를 개최하며 지역 문화활동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김세환 전 원장은 "어느 해인가는 장미여왕선출대회도 개최했는데, 진·선·미에 선출된 아가씨들을 인솔해 서울 MBC에 출연해 원주 이미지를 드높였던 일도 있었다"고 전했다.

또 원주기독병원에는 두면의 테니스 코트가 있었는데 이를 이용해 원주테니스협회를 구성하고 원주에 테니스를 보급하는데 많은 기여를 했다. 아카시아 꽃이 만발한 5월에는 아카시아향이 짙게 퍼져 운동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고 한다. 소문이 퍼지면서 서울에서도 테니스를 좋아하는 귀빈들이 자주 내왕해 주말 테니스를 즐겼고, 병원은 원주여고 테니스팀을 후원하기 시작했다. 테니스가 활성화되면서 어느 해에는 원주에서 전국 테니스 선수권대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지역사회와의 교분

64~65년에는 원주기독병원을 중심으로 P.T.P(people to people)라는 활동이 활발히 전개됐다. 이는 미국의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세계평화를 위한 단체운동의 일환으로 창설한 것인데, 우정과 국제적 교류를 돈독히 하자는 의미에서 시작됐다.

이 활동으로 인해 지역사회단체 간 유기적인 교류가 시작됐다고도 볼 수 있다. 캠프 롱을 포함해 지역기관단체가 모여 정기적인 모임을 가졌으며, 그 일환으로 미국 Virginia주의 Roanoke시와 자매결연을 맺고 원주의 장학생들이 미국 유학혜택을 제공받는 일도 가능해졌다. 특히 미국 독립 200주년 때는 자매도시위원장인 원주시장과 김세환 원장이 초청돼 Roanoke시와 다양한 국제교류를 시행하기도 했다.

이 같은 P.T.P 활동을 통한 유기적인 교류는 지역 내에서도 큰 도움이 됐다. 김세환 전 원장은 "어느 추운 겨울, 정선의 탄광지역에 급환이 발생했지만 폭설로 강원도 산간지방 교통이 두절돼 환자후송이 불가능한 상태였다"며 "이때 캠프 롱에 지원요청을 했더니 헬리콥터를 지원해 주어 내가 정선 탄광촌에 날아가서 환자를 병원으로 후송, 생명을 구한 적도 있다"고 말했다.
 
영서지방의 중추적 의료기관으로...
   
 
  ▲ 설립자 공동대표 쥬디선교사  
 

 70년대부터는 강원도 전역을 대상으로 순회진료를 시작했다. 개원 초창기부터 원주를 중심으로 인근 지역 무의촌에서 정기적인 의료 봉사활동을 실시했고, 사라진 나병환자 수용소에 가서 의료봉사활동을 펼쳤다. 특히 간호사가 중심이 된 지역사회 간호사업을 시작했는데, 재정적으로 장기입원치료가 불가능한 환자나 거동이 불편해 통원이 어려운 환자를 자가로 방문해 간호서비스를 제공하는 일이었다. 지금은 전국의 많은 병원에서 이 사업들을 실시하고 있지만 그 시효는 원주기독병원이었다고 한다.

괄목할만한 것은 한국최초로 의무기록제도를 도입한 것이었다. 우리나라의 경우 1885년 서양의학에 의해 소개되기는 했으나, 의무기록에 대한 개념이나 중요성은 정립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개원과 함께 초대 외과과장으로 부임한 김영우 과장이 도입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1962년 의무기록을 주도하기 시작했다. 5만여권에 달하는 진료기록부에 병원번호를 부여하고 환자색인카드를 작성해 보관하는 기본 작업을 2개월에 걸쳐 완성했다. 그나마 병원 역사가 불과 2년 밖에 안됐다는 점에서 좀 더 일이 수월하게 진행되지 않았나 생각된다.

병원은 교육기관으로서의 역할도 담당했다. 전문의 수련과 간호원 교육을 도맡아 이화여대 간호대생들이 실습을 위해 원주로 모여들곤 했다. 또 임상병리사 수련과 방사선과 기사 수련병원으로 지정돼 많은 수련생들이 이곳에서 공부했으며, 이밖에도 산업재해환자요양병원, 공무원 요양기관으로 사명을 감당하며 각계각층의 환자들을 진료했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으로 강원지역에는 광산과 시멘트공장이 활기를 띠기 시작했는데, 의료시설이 빈약한 지역의 10여개 시멘트공장 및 광산기관과 자매결연을 맺어 그 직원의 가족까지도 의료복지혜택을 부여하기도 했다.

원주기독병원은 의료보험이 시작되기 전부터 의료보험제 형식으로 운영을 시작한 최초의 의료기관이었다. 각 산업장에 의료시설을 설치해 산업보건의 교량역할을 해냈고, 영서지역 내 후송체계의 기틀을 마련하며 오늘날 진료권을 확대하는 데도 크게 기여했다. 도내 의료발전, 그 중심에는 원주기독병원이 있었다.
 
글을 마치며

김세환 제3대 원장은 건강상의 이유로 제50주년 기념행사 초청을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한다. 인터뷰 말미에 그가 전한 말을 옮겨보았다.

"1959년에 50병상의 작은 의료선교병원으로 시작한 원주기독병원이 지금은 800병상이 넘는 대학부속병원으로 발전하여, 원주를 넘어 영서지방의 중심이 되는 종합병원이 되었습니다. 또한 혁신도시 원주의 규모를 뒷받침하는 역할을 감당하게 된 것은 원주기독병원 교직원 여러분의 혼신의 노력과 하나님의 높고 크신 보살핌, 특히 그동안 원주시민 여러분의 끊임없는 지원과 사랑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늘 고맙습니다."

김상희 기자 shkim@wonju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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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 기독병원 전경. 사진 중앙 윗쪽 산 밑 부분이 기독병원이다.

2009년 개원 50주년을 맞은 원주기독병원 전경.

설립자 공동대표 머레이 박사

설립자 공동대표 쥬디선교사

1976년 연세대와 합병 후 가진 기념식 행사.

기족병원 초창기 외래 접수창구. 당시 병원을 찾은 원주시민들의 모습이 정겹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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