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주문화원 문화의집 강의실. 매주 화요일과 목요일 오후시간이면 어김없이 붓과 벼루, 화선지를 챙겨든 사람들로 가득찬다. 먹을 갈아 난을 치고 꽃잎을 피워내는 솜씨들이 유연하다.

그 중에서도 유난히 눈에 띄는 인물이 있다. 26명인 문인화반 내에서는 물론, 문화학교와 문화의 집을 합쳐 13개 강좌 300여명 수강생 중에서도 가장 연장자인 강복희(86·단구동) 할머니가 그 주인공이다. 곱게 센 머리와 단정한 옷차림. 2시간 내내 서서 붓을 놀리지만 자세가 흐트러짐이 없다. 올해 86세라는 나이가 무색할 지경이다.

강복희 할머니에게 올해는 남다르다. 평생의 꿈을 이뤘기 때문. 올초부터 문화의 집 문인화반에서 북천 유필상(51) 화백의 지도를 받고 있다. 최근에는 대한민국 운곡서예문인화대전에서 입상까지 하면서 주위를 놀라게 했다.

일제강점기 일본 히로시마에서 태어난 강 할머니는 소학교 입학 전까지 집안에서 우리말만 쓰다보니 일본말이 익숙치 않아 학교수업을 제대로 따라가질 못했고 당연스럽게 다른 과목에는 재미를 붙이질 못했다. 유일하게 행복했던 수업이 미술과 서예시간. 말을 잘 못해도 크게 지장이 없기도 했지만 붓을 놀려 그리고자 하는 대상을 표현하는 것이 그렇게 재미있을 수 없었다. 그 중에서도 문인화는 빠져들면 들수록 매력이 있었다. 

 "그래도 미술이나 서예에는 소질이 있었던가 봐. 선생님이 방과 후 다른 급우 2, 3명과 함께 남게하고선 별도로 지도를 해주시곤 했어요."

하지만 그 때가 마지막이었다. 소학교 고등과를 졸업하고 양재학원에 다니며 재봉과 재단기술을 익힐 때도, 결혼 후 고국으로 돌아와 아이들을 키우면서도 할머니의 마음 한편에는 다시 붓을 잡고 싶다는 열망이 가득했다. 이곳 저곳 학원 앞을 서성이기도 했다. 하지만 넉넉치 않은 형편을 생각하면 학원을 보내달라는 말이 차마 입 밖으로 나오질 않았다.   

"돌이켜보면 세상 돌아가는 것을 한참 몰랐었지요. 당연히 학원에 나가야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하곤 체념하고 살았으니까."

하지만 어릴적부터 꾼 꿈은 마음 한편에 늘 그늘로 남았다. 장성한 4남매를 출가시키고, 3년전 남편을 먼저 떠난 보낸 후 아쉬움은 부쩍 커졌다. 기회는 우연치 않게 찾아왔다. 아들 초등학교 동창이 작품전시회를 한다는 이야길 듣고 축하하기 위해 문화원을 찾았다가 이 곳에서 문인화를 배울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 혹, 어렵사리 찾은 기회를 놓칠까 올해 수강생 모집 첫 날 1번으로 등록을 마쳤다.

늦어도 한참 늦은 출발이기에 두려움도 있었지만 '평생의 한을 풀었다'는 기쁨이 더 컸다. "나이도 많은데 무리하는 것 아니냐. 맛있는 것이나 드시며 편히 쉬라"는 등 주변 지인들과 가족들의 염려를 불식시키기 위해서라도 더 열심히 하고 싶었다. 나이를 생각하면 길게 바라보고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생각에 조급함이 컸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배 아픈 손자를 어루만지던 따뜻한 할머니 손길같은 마음이 담긴 붓 끝은 결국 일을 저질렀다. 입문 1년도 못돼 대한민국운곡서예문인화대전에서 당당히 입상한 것. 강태연 문화원장을 비롯한 강사들과 문화원 식구들의 축하를 받고 나서야 실감이 났다.

같은 강의실에서 공부하는 오운옥 한국자유총연맹 원주지부 전 지부장은 강 할머니에 대해 "하루도 빠지는 날이 없을 뿐더러 늘 수업 30분 전, 남보다 미리 입실해 준비를 마치고 기다리실 만큼 열심"이라며 "고령인데도 절대 남에게 의지하지 않고 하나부터 열까지 손수 하는 등 너무 열정적이라 젊은 사람들이 부끄러울 지경"이라고 추켜 세운다.

80을 훌쩍넘긴 나이에도 활발한 활동을 가능케하는 힘은 무엇일까. "젊은 사람들과 함께 배우면서 젊어지는 것 같다"고 운을 뗀 할머니는 "처음에는 걱정도 많이 했는데 막상 시작하고보니 점점 자신이 생긴다"고 말한다.

"늘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꿈을 가지고 있었어요. 욕심일지도 모르는데…. 그 꿈을 이루게 돼 더 없이 행복합니다. 어쩌면 꿈을 이루고자 갈망했던 것이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삶의 힘일지도 모르겠어요."

손자들 재롱을 보며 편히 쉴 때인데 힘들지 않느냐는 물음에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잖아요. 어떻게 이룬 꿈인데 힘들 일이 뭐 있겠느냐"는 반문이 되돌아 온다.

"사실 무릎이 좋질않아 단구동 집에서 문화원까지 버스로 오고 가는 일이 조금 버겁긴 했어요. 하지만 다른 곳에 쓸 돈을 조금 아끼고, 지금 하고싶은 일을 맘껏 즐기자는 생각에 요즘은 택시를 타요. 달리 크게 어려움 점은 없어요. 내 건강이 허락하는 한 계속 할 생각입니다." 

 크게 내세울 일이 아니라며 한사코 인터뷰를 사양하던 할머니도 나이때문에 망설이는 사람들을 위해 한마디 해달라는 부탁에는 목소리가 커진다.

"나처럼 생각은 있지만 형편이 안돼 못하는 사람이 많겠지요. 시작하긴 어렵지만 막상 시작해보니 나이가 걸림돌이 되지 않더라구요. 용기를 내보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희끗희끗해진 흰머리가 대변하듯 팔순을 넘어 아흔을 바라보는 그녀는 평생의 꿈을 위해 오늘도 붓을 잡는다.　

김민호 기자 mhkim@wonjutoday.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