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편지 한 통을 받았다. 정성들여 쓴 글씨며 시련을 겪는 아픈 마음이 담겨 있는 내용의 편지는 꽤 오랫동안 편지지에서 손을 놓지 못하게 했다. 메일이나 전화가 아닌 요즈음 참 보기 드문 편지의 향수를 느끼게 한 것도 있지만, 아픔을 같이 겪는다는 공감이 나를 더욱 붙잡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새로 이사를 온 반곡동 아이파크 아파트 베란다에는 치악산 능선이 한눈에 들어오는 전망이 늘 비어 있는 가슴을 말없이 채워주고 있는데, 그 치악산의 긴 능선이 쓰리게 가슴에 빗금을 그으며 다가섰다. 삶의 굴곡 같은 능선의 오르내림이 동쪽 하늘을 떠받치고 있는 푸르름은 험준한 산일수록 멀리서 보면 아름다움으로 다가서는 것처럼, 그런 인생의 능선 같은 가슴을 찌르는 시련을 견딜 수 있는 어떤 공감대가, 더욱 나의 가슴에 진하게 와 닿았는지도 모른다.

지난해 나는 갑작스런 사고로 결혼을 앞둔 막내딸을 잃었다. 모든 사건 사고의 TV뉴스가  어느 날 느닷없이 나에게도 닥쳐올 수 있음을 실감하면서 아픔은 남아 있는 자들의 몫이란 걸 힘들게 깨닫고 견디며 '내 마음의 유적지'란 시집을 냈다. 그 시집을 읽고 시집 속에 '그리움'이란 시 한편과 편지를 보내온 것이다. 졸작 '그리움' 시를 소개하면,

-그리움-
서쪽 하늘로 멈춘 눈길에/ 가슴속으로 가라앉는 슬픔이/ 산그늘로 넘쳐난다/켜켜이 담겨 곰삭은 기억들이/ 저녁 무렵이면 저렇게/ 사무치는 노을로 우러나고/ 보고 싶은 것은 언제나/ 보이지 않는 곳에서/지워질듯 잠겼다가/ 그늘을 딛고 일어선다/날카로운 회한의 벼랑 밑/ 슬픔의 물웅덩이에/ 가득 피어오르는 물보라

편지의 내용을 일부 소개하면, 「김성기 시인님께. 어느덧 무덥던 여름이 조금씩 꼬리를 내리고 있는 듯합니다. 창문을 열어놓고 잠든 날이면 제법 찬 공기가 느껴지는 걸 보면 말이에요. 귀한 책 받고 인사가 많이 늦어졌습니다. 저 또한 견뎌내야 할 슬픔이 너무 깊어 이제야 겨우  펜을 들게 되었지요.

만물이 깊은 잠을 깨고 소생한다는 봄날에 저는 오빠를 먼 곳으로 떠나보냈거든요. 수개월이 지났지만 아직도 눈물이 납니다. 너무나 그립고 보고 싶어 미칠 지경입니다. 그래서 선생님께서 겪어야 했을 아픔이 내 것인 양 낯설지가 않습니다. - 중략 -

저는 선생님의 따님도 또 저의 오빠도 아름다운 세상에 다시 태어났을 거라고 믿어요. 그런 마음이 없인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다는 상실감을 평생 지울 수 없을 테니 말이에요. 따님을 잃은 선생님의 슬픔이 문학의 향기로 승화되기를 저는 바라고 싶습니다. 이제 시월과 함께 가을이 서서히 깊어지겠지요. 가을엔 선생님도 모든 시름을 놓고 마음 안에 평화가 깃들었으면 좋겠습니다. 2008. 9. 민○○.」

우리가 살아가면서 뒤늦게 깨닫고 통탄한들 아무 소용이 없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겠지만 그 중에 가장 큰 것이,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가슴속에 지워지지 않고 남아 있을 사람을 소홀히 하고 시간이 지나면 잊혀질 사람들에게 더 많은 정성을 들이는 우를 범하지는 않나 하는 것이다. 지난 다음에 그렇게 사랑했었음을 뒤늦게 깨달은 들, 가슴에만 남아 있는 사람은 가슴을 저미는 아린 아픔으로만 다가설 뿐이다. 이제는 만질 수도 바라볼 수도 없는 가족이라는 분신의 모습이 사라진 자리엔 못다 한 사랑만큼 아쉬움과 후회의 채찍질이 채워질 뿐이다. 사근진 앞바다의 파도 같은 먼 울림으로만 다가서는 기억의 강기슭을 더듬으며 이 가을에 다시 그리움의 시 한편을 쓰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