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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박경리 선생 유고산문 '일본산고(日本散考)' ⑤
출구(出口)가 없는 것
2008년 09월 08일 (월) 원주투데이 wonjutoday@hanmail.net
   
 
   
 

 자살한 일본작가(日本作家) 아쿠타가와 류노스케(芥川龍之介)의 초기 작품 나생문(羅生門)은 이래저래 유명해진 소설(小說)인데, 일본문학의 특색을 논하기에 적합한 예(例)의 하나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예술지상주의자요 대단한 기교파(技巧派)인 아쿠타가와(芥川)가 자살까지 가게 되는 삯을 이미 간직했던 작품이기도 하다. 그의 호(號)에는 아귀(餓鬼)라는 것이 있다. 오니(鬼)로 발음되는 그 말의 뜻은 글자 그대로지만 우리말로 귀신이라 하기엔 적합하지 않고 도깨비라 할 수도 없는데 아귀(餓鬼)라는 그의 호(號)에서 예술지상주의에 투신할 것을 작심한 만만찮은 의기(意氣)를 엿볼 수 있다.


 그러나 닫혀진 세계였다. 예술지상을 노골적으로 표현(表現)한 작품에 <지옥변(地獄變)>이 있다. 소재(素材)의 특이성 때문에도 그랬겠지만 다분히 조작성(造作性)이 눈에 띄는데 그 작품 얘기가 나오면서 자연히 떠오르게 되는 것은 내용이 비슷한 김동인(金東仁)의 <광화사(狂畵師)>다. <지옥변(地獄變)>의 표절인지 아닌지 그간의 사정은 알 길이 없지만 하여간 별로 기분 좋은 일은 아니다.

 괴기(怪奇)와 탐미(耽美)는 약간씩 다르다. 그러나 상통하는 점도 많다. 감각에 충격을 주는 면에서 그렇고 보편성과 휴머니티의 결여(缺如), 윤리 부재(不在) 또는 반도덕적(反道德的)인 것에서도 공통된다. 그리고 특이(特異)하지만 출구(出口)가 없는 것도 비슷하다. 그것은 총괄적인 인간의 삶 자체가 대상이라기보다 심층에 깔려있는 인간성(人間性)의 어느 부분의 의식(意識)을 끌어내어 그것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이다. 일본문학의 주류(主流)를 이루는 것이 바로 그 같은 특이한 세계인데 일본민족(日本民族)의 특이성이기도 하다. 로맨티즘과도 무관하지 않고, 이런 것들이 통속으로 떨어지면 괴기(怪奇)는 가이단(怪談)으로, 탐미(耽美)는 와이단(猥談)으로, 로맨티시즘은 센티멘털리즘이 된다.

 일본(日本)의 본격문학(本格文學)과 대중문학(大衆文學)은 대체로 그 정도 차이로서 아주 소수를 제외하고 그 세계 밖에 나가면 바람을 타고 위축되어 버리는 것 같다. 적절한 예(例)가 될지 모르지만 일본(日本)에서 많이 쓰이는 말 중에 '수고이!(凄い)'라는 것이 있다. 우리네의 굉장하다는 말과 같이 일종의 감탄사인데 크고 훌륭하다는 뜻의 굉장과 오싹하게 소름 끼친다는 뜻의 수고이, 일본도(日本刀)의 푸른 칼날의 번뜩임. 피가 뚝뚝 떨어지는 살덩어리, 그런 광경과 통하는, 오싹하게 소름끼치는, 수고이의 뜻. 그 말 속에는 괴기(怪奇)와 악마적 탐미(耽美)가 들어있다.

 아무튼 특이(特異)하다는 것은 보편적인 것에 비하여 편협하다는 의미와는 다르게 세계가 좁은 것은 사실이다. 일본문학(日本文學) 중에 그 구성에 있어서 치밀하고 뛰어난 묘사력 세련된 문장(文章)등 대단히 우수한 작품(作品)이 있으나 늘 주제(主題)가 약한 것을 느낀다. 그것은 일본문화(日本文化)의 전반적인 경향이 아닌가싶다.

 추리소설가 에도가와란포(江戶川亂步)의 작품(作品)세계에는 괴기(怪奇)와 탐미(耽美)가 혼합되어 있다. 그러니까 그것은 추리소설이 아닐 수도 있다는 얘기다. 차라리 엽기소설(獵奇小說)이라 해야 하지 않을까싶다. 에도가와(江戶川)의 몇몇 작품, 하도 오래되어서 제목은 생각나지 않지만 맹인(盲人)이 미녀(美女)를 납치하여 감각의 세계에 탐닉하다가 극치 속에서 여자를 살해하는 것이 있었다. 그 비정(非情)의 탐미를 에도가와(江戶川)는 사랑의 극치로 항변하고 있는데 여담이지만 일본인(日本人)들의 특이한 것에 사랑과 치정이 별로 구별되지 않는 성향이 있는 것 같다. 탐미(耽美)의 극치 속에서 여자를 살해하는 과정이 아쿠타가와(芥川)의  <지옥변(地獄變)>에서는 간접적인 예술행위로 나타난다. <지옥변(地獄變)>의 평풍을 그리기 위하여 화염(火炎)에 휩싸여 타죽어 가는 외동딸의 모습을 예술적 감흥, 황홀경에서 미친 듯 그림을 그려 처절(悽絶)한 작품(作品)을 완성했으나 노화사(老畵師)는 목을 매 죽는 것이 개요인데 괴기와 탐미에다 예술지상(藝術至上)을 투영하고 있다. <나생문(羅生門)>은 괴기와 삶을 대비하고 있다. 대비한다기보다 괴기를 소도구(小道具), 배경으로 찌그러진 삶을 부각(浮刻)하고 있다.

 삶을 부정적 시각, 혹은 악(惡)과 비정(非情)을 합리화하고 있다. <곤자쿠모노가타리(今昔物語)>에서 소재(素材)를 얻은 <나생문(羅生門)>은 흉년이 들어 황폐한 성내(城內)에서 갈 곳도 없고 아사(餓死)를 기다릴밖에 없는 머슴이 나생문(羅生門)에서 엉기적거리는데 나생문(羅生門) 누상(樓上)에 원숭이 같은 백발(白髮) 노파의 괴이쩍은 행동을 본다. 노파는 쌓아올린 시체의 머리칼을 뽑고 있었던 것이다. 하인이 노파를 쓰러뜨린즉 노파는 살기 위해, 하는 짓이라는 실토(實吐)였다. 살기 위해서는 무슨 짓인들 못하랴, 하인(下人)은 노파의 옷을 벗겨들고 누상(樓上)에서 뛰어내려 어디론가 사라진다는 대강의 줄거리다.
 바로 이것은 일본(日本)의 모습인 것이다. 과거 침략을 자행했던 역사(歷史)도 그렇지만 경제대국으로 팽창하고 있는 오늘에 있어서도 짙으게 그 옷자락을 끌고 있는 것이다. <곤자쿠모노가타리(今昔物語)>에서 소재로 가져온 나생문(羅生門)에서 나는 삼국유사(三國遺事)의 정수사구빙녀(正秀師救氷女)를 떠올렸다.

 눈은 쌓이고 날은 저물고 정수(正秀)가 삼랑사(三郎寺)에서 돌아오는 길, 천엄사(天嚴寺) 문밖을 지나는데 한 여자거지가 애를 낳고 누워있었다. 그냥 두게 되면 얼어 죽기 십상이라, 정수(正秀)는 따뜻한 체온으로 여인을 안아주니 얼마 뒤 깨어났다. 정수(正秀)는 옷을 벗어 덮어주고 알몸으로 뛰어서 본사(本寺)에 돌아와서 볏짚으로 몸을 덮고 밤을 지냈다.

 중 정수(正秀)가 벌거벗고 본사(本寺)까지 달려가는 모습이 떠올라 빙녀(氷女)의 비극보다 오히려 희극적 요소로 돋보이게 하는 글이었다.

 아쿠타가와(芥川)의 <나생문(羅生門)>이나 <지옥변(地獄變)>은 출구(出口)가 없는 소설(小說)이다. 그리고 비극(悲劇)으로도 보이지 않게끔 작가(作家)의 눈은 차갑고 치밀하게 계산된 것이다. 예술지상(藝術至上)에 몸 바친 화사(畵師)와도 같이, 예술지상주의자(藝術至上主義者) 아쿠타가와(芥川)도 자살(自殺)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사람은 아니 모든 생명은 태어난 이상 살아야 한다. 그러나 살기 위하여 모든 것이 허용되는 것은 아니다. 예술(藝術)도 삶의 투쟁, 삶의 인식, 삶의 조화(調和) 그 모든 삶에 수반되는 엄청나게 거대하고 신묘(神妙)한 본질적(本質的)삶의 교향악 위에서 군림(君臨)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예술(藝術)은 삶의 추구며 방식(方式)이다.

 어느 신문이었던가 일본인(日本人)의 저축열에 대한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저축에 관하여 포상하기도 했던 모양인데 그 기사를 읽은 느낌은 저금통장을 위하여 태어난 것 같았다. 사람은 결코 저금통장의 숫자를 위해 태어난 것은 아니며 살기 위해 태어났고 사는데 필요하기 때문에 저금통장이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왕왕(往往) 그런 착각에 빠지는 수가 있는 것 같다.

 작년(昨年)이던가 볼일이 있어 서울에 갔다가 TV의 일본(日本)프로를 시청한 적이 있었다. 짤막한 팔자(八字)눈썹에 꺼무꺼무한 큰 눈, 유자코에 입술이 두텁고 땀구멍이 송송 나 있는 초로(初老)의 남자 얼굴이 나타났다. 소위 나니와부시(浪花節)의 이야기꾼이었다. 우리 창(唱)에 비하여 노래 부분은 적었고 설명의 부분이 많았는데 내용을 듣자니까 효행(孝行)의 소년(少年) 얘기였다. 병든 홀어머니를 모시고 벌어서 사는데 오야가다(おや-かた: 주인, 두목)가 기특히 여겨 맛있는 것을 주면 먹지 않고 어머니에게 가져다준다는 둥, 명의에게 어머니 치료 부탁하고 싶지만 가난한 집에는 오질 않아 오야가다의 좋은 옷을 빌려 입고 계략을 꾸며서 명의를 집으로 데려 온다는 둥, 그런 내용이었다.

 동네 아낙들의 이웃 얘기쯤, 흔히 있는 일을 그것도 유치한 대사로 엮어나가는 것이, 참 먹고 할 일 없구나 생각을 했는데 놀라운 것은 흥행장 관중 속에 손수건을 꺼내어 눈물을 닦는 광경이었다. 경제사정이 좋아서도 그렇기도 하겠지만 상당히 세련된 모습의 중년 여인(中年女人)의 눈물 닦는 모습은 도대체 그들의 의식수준을 어느 만큼에서 선을 그어야 할지 당황해지는 것이었다. 물론 본시 평명통속(平明通俗)의 절조(節調)라 하더라도.

 나는 1926년 일제시대(日帝時代)에 태어났고 1946년 20세 때 일본(日本)은 이 땅에서 물러갔다. 그러나 일본어(日本語) 일본문학(日本文學)에 길들여진 나는 그 후에도 꽤 긴 세월 지식을 일본서적에서 얻은 것은 사실이다. 왜 이런 말이 필요한가 하면 오늘날 일본인(日本人)들 60대가 가지는 기본적인 일본문화(日本文化)에 대한 인식이 있다는 얘기며 내 자신이 공평(公平)함을 잃어서는 안된다는 다짐 때문에 내 스스로 나를 점검해 본 것이다. 오히려 내 시각과 판단과 기준에 정직할 수 없는 흔들림조차 있다.

 민족적 감정 때문에 사시(斜視)가 되어서는 결코 안된다는 염려 때문이다. 그것은 내가 사시(斜視)가 된다면 일본(日本)의 그 엄청난 사시(斜視)에 대하여 논할 자격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각설하고 내가 열서너살때쯤이던가 통영에서 부산(釜山)가는 윤선 선실에서 들었던 가락, 그것이 무슨 창이었는지 전혀 알지 못하지만 그 기막힌 리듬과 창자를 끊는 것 같은 슬픈 울림과 통곡과 웃지 않을 수 없었던 사실은 똑똑히 기억한다.

 초라한 초로(初老)의 사나이가 가야금을 타며 부르는 창(唱)이었다. 선객들로부터 얼마간의 돈을 받아 선표 값 제하고 며칠간의 식대를 위한 소위 거리의 광대였던 것이다. 전혀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가슴에 충격을 주었던 그것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민족적 정서, 그 선험적인 것 때문이었을까? 그러나 전혀 기준이 없는 것은 아니다. 남의 것도 좋은 것은 좋고 내 것도 나쁜 것은 나쁘다. 좁은 테두리 속의 평이한 그 효행 소년의 얘기에서 심청전(沈淸傳)을 생각하면 우선 시계(視界)부터 탁 트인다. 새삼 장엄한 그 드라마를 인정하게 되는 것이다.
 (미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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