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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림’과 ‘조화로움’
2002년 05월 23일 (목) 원주투데이 webmaster@wonjutoday.co.kr
조각가 박 광 필
충족이나 만족의 대상은 물질이 아니라 인간 그 자체의 정신이다.
봄비가 며칠을 내리더니 농부들의 발걸음이 분주하다.


산새들의 지저귀는 소리와 함께 경운기 소리, 트랙터의 요란한 엔진소리들이 어우러져 조용하던 농촌이 살아 숨쉬는 삶의 터전으로서 정겨움을 맘껏 느낄 수 있는 계절이 돌아 왔다.
온통 푸르름으로 일색이던 마을이 농부의 손길이 닿는 대로 변화한다. 밭의 황토색 속살이 드러나고 곡식이 질서 정연하게 심기고 자라거나, 논들이 갈아 업히고 물이 고여서는 저수지의 수면처럼 하늘을 담아 내다가는 모내기를 하고나면 또 다른 풍경으로 변한다.


이른봄부터 숲의 변화는 무채색에서 실록으로의 변화를 완성하는가 싶더니, 이제는 농부들에 의해서 초록색 들판이 각양각색으로의 변화의 중심에 선다.
앞으로 다시 시간이 흐르면 매미울음 소리에 논밭의 곡식들이 자라서 시골 풍경을 주도해 나갈 것이며, 매미 울음이 그치고 나면 귀뚜라미가 계절을 주도하며 다시 총천연색의 숲과 누런 황금들판을 이루다가는 또다시 농부들의 농기계의 요란한 소리와 함께 소쩍새의 울음으로 대지는 잠이 들고 은백색의 풍경이 찾아 올 것이며, 이런 여러 단계의 변화를 겪으면서 우리는 한해를 보내는 것이다.


그런데 참으로 재미있는 것은, 이런 변화가 어느 하나 조화롭지 않은 게 없다는 사실이다. 새싹이 나면서 봄날의 다양한 변화는 여름의 화려한 녹색으로 바뀌었다가 다시 총천연색의 가을을 지나 흑백으로 대별되는 겨울의 설원까지 어느 하나 조화롭지 않은 모습이 없다.
또 밭을 갈아엎어도, 모내기를 하고 곡식을 심거나 또는 추수를 마친 이후의 들판까지도 주변과 함께 어느 하나 조화롭지 않은 게 없을 뿐더러, 오히려 이렇게 하나하나 변화해 가는 농촌풍경이 자연스럽지 않은게 하나도 없다 .


그런데 여기에 참으로 눈에 거슬리는 풍경이 하나 있다.
농부의 수고로움을 덜기 위해 또는 노동력의 효율성을 위해 논둑이나 밭둑에 뿌려지는 제초제가 문제이다. 제초제를 뿌리고 한 이틀 지나고 부터의 광경은 참으로 흉칙스럽다. 누렇게 시들어 얼룩덜룩 칙칙하게 변하여 오랫동안 그대로인 모습은 분명 자연스러움이나 조화로움은 온데 간데 없고 병든 모습 그 자체이다.


마치 피부병에 걸린 것 같은 들판의 모습이 눈에 거슬리기가 이만 저만 아니다. 농사를 짓지 않는 제삼자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값싼 감상주의이거나, 당사자의 고충을 이해 못하는 배부른 낭만주의자적인 편견이 아닌가 자문해 보면서도 안타깝기는 매일반이다.
영악한 인간의 이기심과 과학문명의 미시적인 이해관계가 서로 얽혀 나타나는 편리함과 수월성, 그리고 노동의 절약이 가져오는 경제적 효율성으로 인해 이런 자연스럽지도 않을 뿐더러 조화롭지도 못한 살풍경한 경관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이렇게 제초제로 죽어 가는 들판의 흉직한 풍경을 보면서 임어당의 ‘한가로움’의 미학 - ‘게으름’의 미학이나 어느 서양 철학자의 ‘느림’의 미학을 떠올리게 되는 것은, 삶이란 양(量)에 대한 가치가 아닌 질(質)에 대한 가치의 문제이며, 충족이나 만족의 대상은 물질이 아니라 결국 인간 그 자체의 정신일 수밖에 없음을 다시 한번 생각해보는 것은 나만의 논리의 비약인가?



원주출생(1956년생) / 대성고, 청주교육대학교,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졸 / 원주 「지금, 여기서부터」전 출품및 운영위원 / 속초 강원국제관광엑스포 야외조각전 출품및 운영위원 / 치악예술관 개관 초대전 / 강원 감영 500년 기념 조형물 제작 / 민긍호 의병장 기념상, 지용주 선수기념상 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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