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치악(雉岳)의 정적(靜寂)속에서 |
|
|
|
|
|
|
차 한잔의 사색
시인 이 영 춘
(원주여자고등학교 교장)
■강원도 평창군 봉평 출생
■원주여고 졸업
■경희대 국문과 및 동 대학원 졸업
■1976년 제19회 《월간문학》
신인작품상으로 등단
■제3회 윤동주 문학상
■제29회 강원도 문화상
(문학부문 1987)
■제10회 경희 문학상(1993)수상
■시집 《종점에서》, 《시지포스의 돌》,
《귀 하나만 열어놓고》, 《네 살던
날의 흔적》, 《점하나로 남기고
싶다》, 《그대에게로 가는 편지》
■수필집 《그래도 사랑이여》 상재
한 해가 고요히 저물고 있다. 오늘 하루도 저물고 있다. 분주하게 이리 뛰고 저리 뛰다가 이토록 고요한 밤이면 나는 문득 나를 돌아본다. 그리고 혼자 자문하며 우울해 진다. ‘이렇게 살아야 하는 건가? 이것이 인생이란 것인가?’ 매일 매일 반복되는 자문에도 답은 없다.
젊은 날 한 때, 사는 이유를 알 수 없던 그 젊은 날에는 곧잘 죽음을 생각했었다. 그리고 책에서 그 답을 찾으려고 애썼다. 삼포능자의 <왜 사느냐고 묻거든>, 루살로메의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에밀 아자르의 <자기앞의 생> 그리고 싸르트르와 까뮈, 카프카에 이르기까지 어느 누구도 답을 주는 사람은 없었다.
“절망은 더 큰 절망으로 극복한다.”는 이상의 말처럼 그들의 작품 속에서 더 우울한 나를 발견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아련한 향수처럼 그렇게 침잠할 수 있는 나에게 도취되기도 했다.
그렇게 세월이 가고, 하루가 가고, 또 많은 날들이 갔다.
젊은 날처럼 책에서 인생을 찾으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냥 하루하루에 끌려가고 있다. 간혹 파불로 네루다의 시라도 읽을 수 있는 날이면 족하다. 그리고 오늘 같이 정적이 감도는 밤, 이런 밤이면 나는 치악산과 마주할 수 있어 더없이 좋다. 내 2층 창가에서 바라볼 수 있는 치악산은 그대로 예술이다.
하루동안 분주하던 이 대지 여기저기에 불빛이 하나 둘 들어오면 치악산은 그대로 어둠에 싸인다. 어둠 속에 치악은 더욱 장중하다. 그 장중함 속에서 느껴지는 고요와 정적, 그것은 그대로 하나의 예술이다.
정적의 예술, 침묵의 예술, 무거움과 가벼움의 대비, 그것은 우리들에게 얼마나 많은 진리를 일깨워 주고 있는가! 그래서 나는 치악의 밤이 좋다. 그 장중의 정적에서 울려오는 그 소리는 나만이 누릴 수 있는 침잠의 극치다. 어떤 글 속에서 읽은 한 장면이 떠오른다.
연인들이라는 영화가 있었다. 묘령의 여인이 기차를 타고 시골 밤길을 달리다가 고장으로 차가 멈춘다. 때마침 그 곳을 지나다가 그녀를 태워준 젊은이는 파리로 가는 중이었고 길은 아직도 멀어 그는 그녀의 집에서 묵어 가기로 한다. 두 젊은이는 밤늦도록 잠을 이루지 못한 채 각기 제 방에서 술잔을 기울이다가 밖으로 나온다.
그 집의 한없이 넓은 후원에는 억새풀밭이 가없이 펼쳐져 있고 멀리서 달빛이 아련한데 남몰래 서로 갈구하고 있었던 연인들이 뜻밖에 마주치자 그들은 짐짓 놀란다. ‘땡그랑’ 하고 술잔을 맞대는 소리가 밤의 정적을 깨트리는 순간, 그 술잔의 입맞춤에서 달빛이 반짝 빛난다. “아름다운 밤!” 하고 여인이 중얼거리자, 그는 여인의 어깨를 쓰다듬으면서 이야기한다. “밤은 여인!” 그리고 나서 두 사람은 입을 모아 신음하듯이 나직하게 뇌까린다. 아! 이 정적(Quelle tranquillite!), 그리고 그 때 브람스의 음악이 흐른다.
지금 이 순간, 음악이 없어도 내 창가 치악산은 정적과 고요의 예술로 흐른다. 이 고요 속에서 나는 나를가꾸고 건져 올리는 침잠을 거듭하리라.
|
|
|
|
|
|
|
|
|
|
 |
전체기사의견(0) |
* 200자까지 쓰실 수 있습니다. (현재 0 byte/최대 400byte)
* 욕설등 인신공격성 글은 삭제 합니다. [운영원칙] |
|
|
|
| 전체기사의견(0) |
|
|
|
|
webmaster@wonjutoday.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