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가 끓었다 무슨 풀무질로 일군 불길이었을까 끓는 빗물 부어 주조하면 어떤 문양과 빛깔이 될까

오랜 가뭄 끝에 내린 비에 세상이 금세 나긋나긋해진다 새벽, 촉촉하게 젖은 잔디를 깎는다 서두를 일 없어 느긋한 가위질에 누렇게 말라 죽은 잎들과 촘촘하게 씨앗 달고 있던 대궁들속절없이 허리가 잘려 나간다

한 달에 한번 정도 만나는 이들이 있다.집안에 들어서면 진동하는 도라지향이 먼저 반기고 그들은 도란도란 앉아서 도라지 껍질을 까느라 열심이다. 한 쪽 귀퉁이에 의자를 놓고 바리깡을 코드에 꽂으면 이내 미용실이 된다. 머리 손질을 받은 그들이 말끔해질

세월에 등 떠밀려 살아온 세월 그 세월이 날 밀어내지 않았더라면 당신을 좀 더 많이 사랑했을 거예요 사랑하는 사람아 좀 더 세상을 빨리 알았더라면 첫닭이 우는 새벽 발걸음 맞추어 고랑 긴 밭을 거닐고 흔들리는 비닐 잡아주며 풀이랑 꽃망울 돌보며 한세상

석양에 밝고 고운 금빛 노을 반짝일 때 잔잔한 수면위로 송사리들 춤을 추고 날개 밑 고개 숨기고 꿈을 꾸는 물오리. 시민들 활보하는 도로변엔 꽃이 활짝 오가는 시민들의 발걸음도 가볍구나 살갑게 미소지으며 고개 숙여 눈인사.

선반 위 파리통은 옛것이 분명한데 자식들 궁상맞다 버리자고 야단이나 내게는 추억이 담긴 잊지 못할 골동품

겨우살이도, 물푸레나무도, 황장금도 하나라고 외치며 가지를 뻗어 어깨동무하지만 기댈 곳 없는 누런 얼굴의 세입자 도와 달라 머리를 조아리고 애원해도임대료를 못 내니 나가라는 종이 한 장

어머니 목숨 맡긴 하늘에도 이승의 그 가을처럼 처연한 국화 꽃 만발합니까. 꽃 속에 살 때는 당신을 잊다가 세상가시 따가우면 왜 그리 그리운지요.

늦은 밤 국형사에 올라 돗자리 펴고 누워 올려다 본 하늘에는 별과 구름이 소곤거리며 얘기하고 눈을 감고 소리에 귀 기울여 보니 범버꾸범버꾸 짝 찾는 새들의 노래조그맣게 졸졸거리는 계곡물 소리

노송에 다닥다닥 다박솔 들게 하고 지나간 세월들을보곳 마다 새긴 뒤에 영롱한 조개빛으로 길을 여는 장인 손학들의 힘찬 날개

그녀는 손닿는 곳의 벽지를 모조리 뜯어낸다. 그녀가 뜯어낸 벽에는 여러 가지 꽃들이 핀다. 장미꽃이 피고, 별이 뜨고, 고양이가 잠자고, 하트와 가로등이 서 있기도 한다.가끔 병원이 떠나도록 괴성을 지르기도 하지만,서른다섯의 그녀는 말을 하지 않는다.

을 밀어주지 않는 아내에게 새벽 잠꼬대로"여보 등 좀 밀어줘"했더니 난데없이 척추가 아파 엎드려 웅크려 자고 있는 내 등을 벅벅 긁는 것이었다살짝 실눈을 뜨고 덕석을 어미 소에게 씌워주는 주인 눈치를 보듯살피는데 분명 아내는 눈을 감았으렷다그러면서 시

텃세를 부리며 커가는 사람이 있고 텃세 때문에 적어지는 사람이 있지만 바람을 맞으며 커가는 느티나무를 보면, 문득

수련 꽃 이슬 젖는 옛님의 토지 정원 청개구리 작은 몸짓 돌담 벽에 젖어 들고 가녀린 담쟁이 넝쿨 하늘 뻗는 여름밤 숱한 밤 지새우며 혼신을 불살랐던 원고지 가득담은 만년필 잠가버린고운님 그윽한 눈 빛 별이 되어 빛나고

하루 종일어머니는 밖에서 지짐질이신가냄새도 없이 전 부치는 소리밖을 내다보니마당은 온통 물보라 일고

니 초등학교 때 쪼르르 세 놈이 소풍이 가는데 머시마 둘은 사이다를 넣어 주고 니는 물만 담아 보낸 게아직 걸리는 거라 지천명에 발을 디민 딸 앞에 기어이 눈물샘을 터치는 엄마 노인들 모여 사는 사랑의 종이접기 봉사 날 할머니 한 분 공업용 풀 한 통

풍물 시장 김 가게 여자는 종일 고소해요 맛있어요말만 한다 실성기 있는 눈웃음을 비치며 뻥튀기 집 아줌마들끼리 시비가 붙고 물개 옷을 입은 남자가 배밀이를 하며 지나가고 엄마 손을 놓친 아이가 큰 소리로 울어도 고소해요 맛있어요 말밖에 할 줄 모른다

쌓이는 두께에 또 한 페이지가 덮힌다 남은 페이지도 누렇게 낡아 지나가는 시간을 끼워 넣어도 금방 빛바랜 모습으로 덮여버린다 묻혀 있는 시간을 뒤적이면 문득 떠오르는 장면들처럼 구름 한켠 잠깐 열리며 햇빛을 뿌리더니 이내 닫힌다

나의 유년기에는 언제나 기차가 달린다 백척교를 힘차게 달려 또아리굴을 빠져 나갈 때마다 한 폭의 수채화 같던 기차, 기차들